[1社 1병영] 이명철 국군수도병원장 "軍서 깨달은 '함께'의 힘…도전정신의 밑거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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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병영 이야기
'빡빡머리'의 연대장 후보생
얼차려 사고에 사과 받아내
동료 함께할 때 '리더 힘' 생겨
'빡빡머리'의 연대장 후보생
얼차려 사고에 사과 받아내
동료 함께할 때 '리더 힘' 생겨
나는 항상 어떤 일에 도전하는 것을 즐긴다. ‘Something special, something different, something impossible.’ 이것이 내 도전 정신의 기반이 되는 세 가지 기조다. 물론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 어렵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려면 나와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 줄 동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함께’의 소중함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꼈던 기간이 바로 군 복무 시절이었다.
1978년 4월, 서울대 내과 전공의를 수료한 뒤 입대했다. 사실 입대 초기에는 말 그대로 좌충우돌이었다. 대구 국군군의학교에 입대하기 전 으레 다른 군인들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들어갔더니, 장교 후보생은 단정한 스포츠머리가 원칙이라는 것이었다. 졸지에 입대와 동시에 중대장에게 ‘명령 불복종’ 소리를 듣고, 부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 돼버렸다.
다행히 나중에는 그 일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돼서 빡빡머리에 덩치 큰 연대장 후보생으로 낙찰됐다. 그러나 당시는 몸집이 다소 뚱뚱했던 터라 연대장 후보생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 결국 책임감을 갖고 평소에도 구보 연습이나 운동을 꾸준히 했고, 나중에는 구령을 부르며 770명의 동기들을 앞에서 이끌고 뛰어다녀도 끄떡없을 만큼 체력을 단련했다. 그때는 그저 그 자리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번은 후보생 중 한 명이 간부의 지나친 얼차려 때문에 이가 두 개나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부대에서는 훈련 중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얼차려가 너무 심해서 벌어진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일로 모든 후보생들이 감정적으로 동요했고, 나 역시도 연대장 후보생으로서 그저 묵인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후보생들과의 합의를 거쳐, 간부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해당 사고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나 혼자가 아닌, 후보생 전체가 힘을 합해 사과를 요구했고,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사실 연대장 후보생으로서 후보생들의 리더 역할을 하면서, 혹시나 나중에 불이익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무척이나 걱정이 됐다. 임관도 못 하는 것은 아닐지, 혹시 의사면허가 취소되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다행히 사건이 잘 해결됐고 우리는 다시 훈련생의 위치로 돌아와 착실히 훈련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느꼈다. 내가 단지 연대장 후보생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용기가 샘솟고 책임감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리더의 역할을 할 때, 나를 믿고 나와 함께 용기를 내주는 동료, 팀원, 동지들이 함께하니 힘든 일도 용감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훈련을 마치고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1부 1과 2실장으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내과 부장, 유행성출혈열과 과장, 동위원소실 실장, 인공신장실 실장을 맡았는데, 특히 유행성출혈열과 과장일 때 치료팀은 최상의 드림팀이었다. 밤중에 복막투석, 수술 집도 등 민간 병원이나 다른 곳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헬기로 이송돼 오곤 했다.
그 후 34년이 지나 올해 2월, 나는 마치 운명처럼 다시금 국군수도병원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민간 의사 출신 병원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부담감도 컸다.
이제 다시금 내가 도전해야 할 일이 생겼다. 대학병원 교수로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험난한 길을 택한 나는 또 한번 ‘함께’의 힘을 발휘하려 한다. 인간의 인생 동력은 세 가지가 있다. 바로 꿈의 크기, 변화의 크기, 네트워킹의 크기다. 이 세 가지는 인생동력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모든 것은 나 혼자 하기엔 시간도, 돈도, 힘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함께하는 것, 더불어 하는 것이다. 국군수도병원은 지금으로선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함께’의 원칙으로 대한민국 국군장병과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국내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키워낼 작정이다.
이명철 < 국군수도병원장 >
1978년 4월, 서울대 내과 전공의를 수료한 뒤 입대했다. 사실 입대 초기에는 말 그대로 좌충우돌이었다. 대구 국군군의학교에 입대하기 전 으레 다른 군인들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들어갔더니, 장교 후보생은 단정한 스포츠머리가 원칙이라는 것이었다. 졸지에 입대와 동시에 중대장에게 ‘명령 불복종’ 소리를 듣고, 부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 돼버렸다.
다행히 나중에는 그 일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돼서 빡빡머리에 덩치 큰 연대장 후보생으로 낙찰됐다. 그러나 당시는 몸집이 다소 뚱뚱했던 터라 연대장 후보생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 결국 책임감을 갖고 평소에도 구보 연습이나 운동을 꾸준히 했고, 나중에는 구령을 부르며 770명의 동기들을 앞에서 이끌고 뛰어다녀도 끄떡없을 만큼 체력을 단련했다. 그때는 그저 그 자리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번은 후보생 중 한 명이 간부의 지나친 얼차려 때문에 이가 두 개나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부대에서는 훈련 중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얼차려가 너무 심해서 벌어진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일로 모든 후보생들이 감정적으로 동요했고, 나 역시도 연대장 후보생으로서 그저 묵인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후보생들과의 합의를 거쳐, 간부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해당 사고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나 혼자가 아닌, 후보생 전체가 힘을 합해 사과를 요구했고,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사실 연대장 후보생으로서 후보생들의 리더 역할을 하면서, 혹시나 나중에 불이익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무척이나 걱정이 됐다. 임관도 못 하는 것은 아닐지, 혹시 의사면허가 취소되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다행히 사건이 잘 해결됐고 우리는 다시 훈련생의 위치로 돌아와 착실히 훈련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느꼈다. 내가 단지 연대장 후보생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용기가 샘솟고 책임감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리더의 역할을 할 때, 나를 믿고 나와 함께 용기를 내주는 동료, 팀원, 동지들이 함께하니 힘든 일도 용감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훈련을 마치고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1부 1과 2실장으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내과 부장, 유행성출혈열과 과장, 동위원소실 실장, 인공신장실 실장을 맡았는데, 특히 유행성출혈열과 과장일 때 치료팀은 최상의 드림팀이었다. 밤중에 복막투석, 수술 집도 등 민간 병원이나 다른 곳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헬기로 이송돼 오곤 했다.
그 후 34년이 지나 올해 2월, 나는 마치 운명처럼 다시금 국군수도병원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민간 의사 출신 병원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부담감도 컸다.
이제 다시금 내가 도전해야 할 일이 생겼다. 대학병원 교수로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험난한 길을 택한 나는 또 한번 ‘함께’의 힘을 발휘하려 한다. 인간의 인생 동력은 세 가지가 있다. 바로 꿈의 크기, 변화의 크기, 네트워킹의 크기다. 이 세 가지는 인생동력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모든 것은 나 혼자 하기엔 시간도, 돈도, 힘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함께하는 것, 더불어 하는 것이다. 국군수도병원은 지금으로선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함께’의 원칙으로 대한민국 국군장병과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국내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키워낼 작정이다.
이명철 < 국군수도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