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이 강남아파트의 무너져 내린 벽면과 가스배관 등을 살피고 있다. 왼쪽부터 안무영 한국건설안전협회장, 전재열 단국대 건축공학과 교수, 신창현 이레이엔씨 대표.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전문가들이 강남아파트의 무너져 내린 벽면과 가스배관 등을 살피고 있다. 왼쪽부터 안무영 한국건설안전협회장, 전재열 단국대 건축공학과 교수, 신창현 이레이엔씨 대표.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신대방역에서 구로디지털단지역 사이를 지나다 보면 유독 낡은 아파트 단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관악구 조원동에 1974년 준공된 ‘강남아파트’다. ‘강남(江南·한강 남쪽)’에 있다고 해서 당시 붙여진 이름이다. 강남아파트는 전용면적 42~46㎡(12~14평)가 대부분으로 6층 17개동(876가구) 규모다. 과거에는 구로공단에 출퇴근하던 근로자들이 주로 살았다. 2000년대 들어 시흥대로 바로 건너편의 구로공단이 정보기술(IT) 업체가 밀집한 구로디지털단지로 ‘천지개벽’한 데 반해 강남아파트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때 서민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던 강남아파트는 그러나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흉물로 변한 지 이미 오래다. 준공 22년 만인 1996년 실시된 정밀안전진단에서 D등급 판정을 받아 재난위험시설물로 지정됐지만 재건축 표류로 20년 가까이 방치돼 왔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다니…”

13일 오전 8시. 건축공학·안전진단 전문가들과 함께 강남아파트를 찾았다. 단지 입구에 들어서자 300여m 인도에 설치된 철제 지붕이 보였다. 아파트 벽면엔 낙석위험이 있다는 경고문도 붙어 있다. 단지 내부는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떨어져 내린 콘크리트가 나뒹굴고 바닥은 군데군데 파여 있었다. 곳곳에 쌓인 온갖 폐기물로 악취가 났다. 상당수 가구의 창호는 뜯겨져 있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줬다.

이날 동행한 전재열 단국대 건축공학과 교수(대한건축학회 부회장)는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게 놔두나”라며 혀를 찼다. 건물안전진단 전문가인 안무영 한국건설안전협회장은 “30여년간 건물안전진단 일을 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곳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외벽에 난 폭 4㎝ 정도의 균열로 볼 때 콘크리트 구조체에 심각한 위험이 있다고 진단했다. 벽면 밖으로 노출된 철근이 녹슬며 부피가 팽창해 콘크리트가 터져 나오는 ‘배불림 현상’도 관찰됐다.

35년간 이곳에 거주한 정모씨(72)는 “며칠 전에도 5층 외벽 일부가 떨어져 나갔는데,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며 “조합과 구청의 무관심에 직접 안전 펜스를 설치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낙석으로 차량이 파손되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각 동 지하세대에는 물이 차 있어 건물 침하 우려도 있었다. 건물유지관리 전문가인 신창현 이레이엔씨 대표는 “일부 동은 이미 살짝 기울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가스폭발사고 우려도 제기했다. 가스배관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벽돌식 외벽에 아찔하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신 대표는 “외벽이 균열로 무너지면 가스배관이 터져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강남아파트는 건물 구조의 안전성뿐 아니라 주거환경도 매우 열악했다. 단지 곳곳에 쌓인 폐기물은 전염병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 주민들은 500가구가 넘는 빈집에 노숙자나 청소년들이 들어와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기물을 파손하고 오물을 버리는 일도 많다고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하루빨리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해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안 회장은 “안전진단을 다시 받으면 E등급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E등급이 나오면 구청은 주민퇴거명령을 내릴 수 있다.

◆재건축 표류로 세입자 늘고 있어

강남아파트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거주자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원동 주민센터에 따르면 13일 현재 강남아파트엔 284가구 6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신고돼 있다. 당초 알려진 230~250가구를 크게 웃도는 것이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최근 빈집을 조선족 등에 세 주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미신고 세대를 감안하면 실제 입주민은 3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중개업소는 추정하고 있다. 거주자 중엔 안전사고에 취약한 어린이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거주자가 늘어나는 이유는 재건축이 언제 진행될지 불확실한 탓이다. 재건축을 위해 집을 비웠던 조합원들은 재건축이 지연되자 월세 수입을 위해 세입자를 들이고 있다. 조합의 판단에 따라 2006년부터 현금청산대상자를 제외한 조합원 600여가구가 관리처분인가도 받기 전 먼저 이주했다.

그러나 재건축 사업이 계속 표류되면서 이주한 조합원들은 이주비 대출금에 대한 이자까지 부담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동안 수차례 관리처분인가 문턱까지 갔지만 그때마다 조합이 더 좋은 계약조건을 명분으로 시공사 변경을 추진해 번번이 무산됐다. 조합은 지난 3월엔 또 시공사를 변경했다. 벌써 세 번째다. 조합원들은 △조합 집행부 △분양자 모임(조합장 반대파) △현금청산자(비대위) 등으로 사분오열돼 상호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강남아파트의 재건축은 복마전(伏魔殿)으로 치닫고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옆에 흉물처럼 서 있는 강남아파트 전경.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서울지하철 2호선 옆에 흉물처럼 서 있는 강남아파트 전경.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10년 전 안전진단…소극적인 구청

주민들은 관악구청이 강남아파트의 안전문제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지 내 가득 쌓인 폐기물이나 곳곳에 뒹굴고 있는 낙석 등 어느 곳에도 행정당국의 ‘손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구청도 강남아파트에 대해 월 1회 정기점검과 분기별 수시점검을 실시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점검이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불만이다.

구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안전점검 의무는 구청에 있고, 안전조치 이행의무는 토지 등 소유자에게 있다”며 “점검 결과에 따라 조합 등에 안전조치를 취하도록 계속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강남아파트에 대한 마지막 안전진단은 2004년 이뤄졌다. 그때도 D등급이었다. 10년이 지난 만큼 전문가들의 권고대로 다시 안전진단을 실시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구청 측은 “구청이 안전진단을 할 의무는 없다”고 답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상 재건축을 진행 중인 경우 주민들의 요청이 있으면 안전진단을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구청의 이 같은 태도는 그러나 강남아파트가 재난위험시설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지적이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27조에 따르면 구청은 재난이 발생할 위험이 높다고 인정되는 시설 등에 대해 관리·정비는 물론이고 소유자 등에 대해 정밀안전진단을 명령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또 동법 제40조를 보면 재난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구청이 해당 지역 주민에 대피명령을 내릴 수 있다. 안전행정부 재난총괄과 관계자는 “구청은 위험요소를 제거하도록 조합 등에 명령을 내릴 의무가 있으며,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행정대집행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주비 지급 등을 부담스러워하는 관악구가 E등급이 나올 수 있는 안전진단을 꺼린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주민퇴거명령이 내려지면 관악구와 같이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이주비 등 비용 부담이 상당히 클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관악구의 재정자립도는 25.3%로 서울시내 25개 구청 중 18위다. 김 교수는 “앞으로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에서 강남아파트와 비슷한 안전 이슈가 언제든 제기될 수 있다”며 “국민 안전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상급기관인 서울시나 국토교통부 등이 관심을 갖고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