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 생시야! > 독일의 마르틴 카이머가 16일(한국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CC 넘버2코스에서 제114회 US오픈 우승을 확정지은 뒤 감격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꿈이야 생시야! > 독일의 마르틴 카이머가 16일(한국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CC 넘버2코스에서 제114회 US오픈 우승을 확정지은 뒤 감격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코스와의 사투(死鬪)’로 유명한 US오픈에서 한때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마르틴 카이머(독일)가 주무기로 삼은 것은 일명 ‘텍사스 웨지’(그린 밖에서 퍼터로 공략하는 것)였다. 브리티시오픈 대회 코스를 연상시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CC 넘버2코스(파70·7562야드)의 그린은 ‘솥뚜껑’보다 경사가 심한 ‘돔구장’처럼 생겨 번번이 선수들의 발목을 잡았다. 공은 그린에 올라갔다가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며 그린 밖으로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그린 주변에서 어떻게 파세이브를 하느냐가 제114회 US오픈의 승부처였다.

○철저하게 ‘텍사스 웨지’로 공략

카이머가 16일(한국시간) 최종합계 9언더파 271타로 공동 2위인 리키 파울러, 에릭 콤프턴(이상 미국)에 무려 8타 차 완승을 거둔 것은 코스의 특성에 맞게 텍사스 웨지를 사용한 덕택이다. 텍사스 웨지는 텍사스 출신 ‘골프의 전설’ 벤 호건(미국)이 주로 사용해 붙여진 이름이다. 호건은 잔디가 마르고 딱딱한 지면이 많은 텍사스 골프장에서 웨지 대신 퍼터로 그린을 공략했다.

카이머는 볼을 그린 위에 올리지 못했을 때 어김없이 웨지가 아닌 퍼터를 꺼내들었다. 러프가 없는 데다 굴곡이 심한 그린을 공략하는 데는 웨지로 볼을 띄우기보다 퍼터로 굴려 홀에 붙이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수는 웨지로 어프로치샷을 구사했으나 볼을 홀 옆에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세르히오 가르시아는 웨지로 친 볼이 그린 프린지에 있는 스프링클러를 맞고 다시 그린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불상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콤프턴은 14번홀에서 페어웨이 우드를 이용해 칩샷을 시도했으나 홀에 못 미쳤다.

카이머는 브리티시오픈 코스와 비슷한 대회장이 많은 유러피안투어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린 밖에서 볼을 굴리는 경험이 많았다. 캐디백 안에 든 14개의 클럽 중에 가장 정교한 클럽은 퍼터라는 점을 카이머가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텍사스 웨지' 든 카이머…US오픈 '솥뚜껑 그린' 정복하다
○사상 두 번째 대회 최소타 우승

카이머는 첫날부터 선두를 한 번도 뺏기지 않으며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을 달성했다. 114년 역사의 이 대회에서 여덟 번밖에 안 나온 진기록이다. 2위와 8타 차는 역대 네 번째로 큰 타수 차다. 합계 271타는 2011년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가 콩그레셔널CC에서 작성한 268타에 이어 역대 두 번째 72홀 최소타 기록이다. 우승상금은 162만달러(약 16억5000만원).

2010년 PGA챔피언십에서 첫 메이저 왕관을 썼던 카이머는 두 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세계랭킹 산정을 시작한 1986년 이후 만 30세가 안돼 세계랭킹 1위에 오르고 2개의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고(故) 세베 바예스테로스(스페인)와 어니 엘스(남아공), 타이거 우즈(미국), 매킬로이 등과 함께 메이저 2승이라는 기록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독일 선수가 US오픈에서 우승한 것은 카이머가 처음이다. 카이머는 자신의 멘토로 두 차례 마스터스를 제패한 베른하르트 랑거(독일)를 거론하며 “이제 브리티시오픈만 석권하면 ‘독일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고 말했다.

세계랭킹 28위에서 11위로 도약한 카이머는 2011년 2월에 등극해 8주간 지켰던 랭킹 1위에 재도전하게 됐다. 당시 페이드샷 하나로 랭킹 1위에 오른 카이머는 드로 구질에 유리한 마스터스 대회 장소 오거스타에서 4년 연속 커트 탈락하면서 ‘종이 호랑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드로샷을 치기 위해 2년간 스윙 교정에 들어갔으나 실패하면서 슬럼프에 빠졌고 최근 스윙 교정을 중단한 뒤 제 기량을 되찾았다.

○어머니의 날 이어 아버지의 날에 우승

카이머는 한 시즌에 플레이어스챔피언십과 US오픈을 동시 석권한 사상 첫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지난달 어머니의 날에 암으로 사망한 어머니에게 플레이어스챔피언십 우승컵을 선사한 카이머는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날에 다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카이머는 “독일은 몇주 전 ‘아버지의 날’이 이미 지났다”며 “그때 아무것도 못해드렸는데 이번에 독일에 계신 아버지에게 우승컵을 선물하게 됐다”고 즐거워했다.

재미 동포 케빈 나(31)는 합계 3오버파 공동 12위에 오르는 선전을 펼쳤으나 1타 차로 공동 10위 안에 들지 못해 내년 US오픈 출전권을 놓쳤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