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대선, 0.4%p 차이로 맞혀 생생한 쇼 보여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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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40주년 맞은 한국갤럽 박무익 회장
과학적 여론조사 '첫 도입'
"뜨거운 한국사회, 쿨하게 만들어"
부정확·수준낮은 조사 많아 '착잡'
과학적 여론조사 '첫 도입'
"뜨거운 한국사회, 쿨하게 만들어"
부정확·수준낮은 조사 많아 '착잡'
과학적인 여론조사를 국내 처음으로 도입한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17일로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박무익 한국갤럽 회장(사진)은 1974년 갤럽 전신인 KSP(코리아 서베이 폴)를 세운 뒤 줄곧 한우물을 파온 이 분야의 ‘산증인’이다. 16일 서울 사직동 갤럽 본사에서 만난 박 회장은 “뜨거운 한국사회를 합리적으로 쿨(cool)하게 만들어 오는 데 갤럽이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갤럽이 처음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1987년 13대 대선 때다. 당시 갤럽은 최초 여론조사 방식의 당선인 예측 결과를 발표해 득표율 오차 2%포인트로 노태우 후보를 적중시켰다. 선거일 전날까지 인구에 비례한 전국 각 지역 무작위 표본추출 방식으로 1500명을 뽑아 한 달여 전부터 매주 1회 설문조사해 종합한 결과다.
박 회장은 “당시 집집마다 방문조사를 했다”며 “이듬해부터 회사가 수년간 매년 배로 성장해왔다”고 말했다. 갤럽은 15대 대선 때 더 드라마틱한 일을 했다. 김대중 당시 후보의 득표율을 39.9%로 내다봐 실제 득표율 40.3%와 불과 0.4%포인트 오차로 당선을 예측했다. 박 회장은 “이회창 후보 측 캠프에서 갤럽조사 결과를 본 직후 재떨이가 날아가 TV가 깨졌다고 했다. 실화다”며 웃었다. 그는 “국민에게 생생한 여론조사 ‘쇼’를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박 회장은 “민주주의의 요체는 과정의 공개이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 여론조사”라고 강조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주먹구구식이나 감정적이 아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리적으로 하는 풍토가 1987년 ‘여론조사 쇼’ 이후 각계에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그는 자평했다.
그는 요새 부정확하고 수준 낮은 여론조사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며 착잡해했다. “대충 상대를 정해 조사한 뒤 숫자만 나오면 여론조사인줄 아는데 착각입니다. 응답률이 보통 3%가 채 되지 않는 ARS 조사 결과는 엉터리입니다. 또 표본을 무작위로 추출하지 않는다면 조사의 의미가 없어요.”
갤럽의 매출(지난해 257억원) 가운데 약 80%는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나온다. 신제품 개발·광고효과 측정·부동산 리서치 등이다. 박 회장은 “아파트 가구당 면적을 얼마씩 정해 조합할 것이냐 등도 청약 예정자, 부동산업자 등을 상대로 여론조사해 반영하는 건설기업이 많아지고 있다”며 “한 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기업이 망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결정을 방지해 주는 것이 여론조사”라고 말했다. 갤럽은 또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 정당 지지도 등 이슈와 지난 6·4 지방선거 결과 관련 조사 등 시의성 있는 여론조사를 ‘데일리 오피니언’이란 이름으로 매주 진행해 발표하고 있다. 그는 “사회 각 분야에 정확한 ‘자’가 항상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매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철학과 62학번인 그는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한약방을 하던 식구들과 함께 초·중·고교는 경주, 포항, 대구를 옮겨다니며 다녔다. “초등학교 때 피란하면서 경주까지 멀리서 들려왔던 북한군 포탄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며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비극, 무자비함과 참혹함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모든 직원을 아들딸 대하듯 하는 박 회장은 ‘젊음이 좋아’ 틈만 나면 직원들의 사진을 찍는다. 박 회장은 “학생교육, 노인복지 등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재단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lhs@hankyung.com
갤럽이 처음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1987년 13대 대선 때다. 당시 갤럽은 최초 여론조사 방식의 당선인 예측 결과를 발표해 득표율 오차 2%포인트로 노태우 후보를 적중시켰다. 선거일 전날까지 인구에 비례한 전국 각 지역 무작위 표본추출 방식으로 1500명을 뽑아 한 달여 전부터 매주 1회 설문조사해 종합한 결과다.
박 회장은 “당시 집집마다 방문조사를 했다”며 “이듬해부터 회사가 수년간 매년 배로 성장해왔다”고 말했다. 갤럽은 15대 대선 때 더 드라마틱한 일을 했다. 김대중 당시 후보의 득표율을 39.9%로 내다봐 실제 득표율 40.3%와 불과 0.4%포인트 오차로 당선을 예측했다. 박 회장은 “이회창 후보 측 캠프에서 갤럽조사 결과를 본 직후 재떨이가 날아가 TV가 깨졌다고 했다. 실화다”며 웃었다. 그는 “국민에게 생생한 여론조사 ‘쇼’를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박 회장은 “민주주의의 요체는 과정의 공개이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 여론조사”라고 강조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주먹구구식이나 감정적이 아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리적으로 하는 풍토가 1987년 ‘여론조사 쇼’ 이후 각계에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그는 자평했다.
그는 요새 부정확하고 수준 낮은 여론조사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며 착잡해했다. “대충 상대를 정해 조사한 뒤 숫자만 나오면 여론조사인줄 아는데 착각입니다. 응답률이 보통 3%가 채 되지 않는 ARS 조사 결과는 엉터리입니다. 또 표본을 무작위로 추출하지 않는다면 조사의 의미가 없어요.”
갤럽의 매출(지난해 257억원) 가운데 약 80%는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나온다. 신제품 개발·광고효과 측정·부동산 리서치 등이다. 박 회장은 “아파트 가구당 면적을 얼마씩 정해 조합할 것이냐 등도 청약 예정자, 부동산업자 등을 상대로 여론조사해 반영하는 건설기업이 많아지고 있다”며 “한 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기업이 망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결정을 방지해 주는 것이 여론조사”라고 말했다. 갤럽은 또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 정당 지지도 등 이슈와 지난 6·4 지방선거 결과 관련 조사 등 시의성 있는 여론조사를 ‘데일리 오피니언’이란 이름으로 매주 진행해 발표하고 있다. 그는 “사회 각 분야에 정확한 ‘자’가 항상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매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철학과 62학번인 그는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한약방을 하던 식구들과 함께 초·중·고교는 경주, 포항, 대구를 옮겨다니며 다녔다. “초등학교 때 피란하면서 경주까지 멀리서 들려왔던 북한군 포탄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며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비극, 무자비함과 참혹함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모든 직원을 아들딸 대하듯 하는 박 회장은 ‘젊음이 좋아’ 틈만 나면 직원들의 사진을 찍는다. 박 회장은 “학생교육, 노인복지 등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재단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l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