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청와대는 정책조정기능 포기했나
꼭 20년 전이다. 1994년 파리모터쇼를 취재하다가 산업통상자원부(당시 상공자원부) 차관보의 부탁으로 전시장을 함께 둘러본 적이 있다. 모터쇼 참관은 처음이라고 했다. 웬만큼 둘러본 뒤 그에게 이런 설명을 해줬다. “유럽 업계는 모두 경유승용차를 출품했지요. 그런데 우리 업체 부스에는 가솔린모델만 있어요. 유럽은 이제 경유승용차가 대세입니다. 우리도 유럽 시장을 공략하려면 서둘러 국내 시장에 경유승용차 판매를 허용해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에이, 안돼요. 경유차는 매연의 주범인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시장을 빠져나간 그는 나중에 장관이 됐다.

당시 모터쇼를 휘어잡은 ‘커먼레일 디젤엔진’은 세계 자동차산업의 트렌드를 단숨에 바꿔놓은 환경친화적 엔진이다. 유럽 승용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디젤승용차 비중을 15%에서 10년 만에 50% 이상으로 끌어올렸으니 말이다. 그런 엔진을 산업 진흥을 책임진다는 주무 부처가 줄곧 ‘매연의 주범’으로 여겨왔으니 한국의 디젤엔진 기술이 발전할 리 없었다.

그러던 산업부가 경유승용차 얘기를 꺼내든 것은 외압 탓이다. 1999년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유럽에서 차를 팔려면 이산화탄소(CO2) 배출을 줄이겠다는 자율협약을 맺으라고 요구해온 것이다. 휘발유차량의 CO2 발생량을 줄이는 게 불가능하면, CO2 발생량이 적은 경유승용차를 수출하라는 각서나 다름없다. 업계는 자율협약에 서명했고 2001년부터 경유승용차를 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한국이 유럽에 경유승용차를 수출하자 당장 한국도 경유승용차 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산업부가 그제야 경유승용차 시판 허용이라는 안건을 들고 부처 간 협의에 나섰다. 답답한 노릇이다.

여기서 기획재정부가 등장한다. 경유승용차 판매를 허용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기울자 세수 감소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경유 가격은 휘발유의 44% 수준에 불과했다. 해외에서는 오히려 휘발유보다 비싸다는 경유이지만 서민이 사용한다는 이유에서 세금을 덜 매겨온 탓이다. 휘발유 사용량의 10%만 경유로 전환돼도 세수가 6000억원 넘게 펑크나는 상황이었다.

기재부가 환경부를 동원해 내놓은 해결책이 터무니없다. 경유승용차 판매를 허용하면서 환경 기준을 유럽보다 무려 25배나 높게 설정한 것이다. 세계 어느 회사도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기준이었다. 국내외 기업에 공히 적용되는 기준이니 통상마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억지 정책’ 탓에 한국은 또다시 디젤 기술을 키울 기회를 잃고 말았다. 경유차 판매를 막아 놓고 정부가 한 일은 경유값을 휘발유의 85% 수준으로 높이는 에너지가격 개편 작업이었다. 세수 감소분을 벌충할 시간을 버는 게 중요했지, 산업경쟁력 강화는 안중에도 없었던 셈이다. EU의 압력으로 환경 기준이 낮아져 경유승용차 판매가 실제로 이뤄진 게 2005년이다. 디젤엔진을 100년 넘게 주물러온 유럽 업체에 국산 경유승용차가 경쟁 상대가 될 리 만무하다. 요즘 거리에 판을 치고 있는 유럽산 승용차가 바로 그 증거다.

산업경쟁력을 이토록 무시해온 정부가 내년에 시행하겠다고 떼를 쓰는 것이 저탄소차협력금제도다. CO2를 많이 배출하는 차량에는 부담금을 물리고, 기준보다 적게 배출하는 차량에는 지원금을 주는 제도다.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니다. 휘발유차량이 주력인 국산차를 사는 소비자에게서 돈을 걷어 디젤차가 주력인 유럽 차를 돕겠다는 터무니 없는 정책이다. ‘땜질식 규제’로 만신창이가 된 업계에 이제 와서 왜 기술개발 노력을 게을리했냐며 꿀밤을 주고 있으니.

환경부는 아직도 케케묵은 논리로 ‘마이웨이’를 외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기재부와 산업부가 정신을 차려 환경부의 저탄소차협력금제도를 강력히 반대한다고 한다. 문제는 경제부처와 사회부처의 이견을 조율할 책임총리가 ‘부재 중’인데다 청와대도 뒷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누가 하나.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