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일그러진 세계 1위 펀드 국가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는 전설적인 투자자다. 두 사람에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자기 돈의 90% 이상을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에 넣고 있다는 점이다. 펀드 성과가 부진하면 고객과 똑같이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 해외에선 운용사들이 회사 돈을 최소 20~30% 투입한 펀드를 내놓는 게 흔한 일이다.

월가에서 20년 넘게 펀드매니저로 일한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미국만 해도 운용사와 펀드매니저들이 회사 고유자금이나 개인 돈을 자기 펀드에 투자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며 “그래야 고객들도 더 믿고 돈을 맡길 것 아니냐”고 말했다.

외국에서 일반화된 이런 투자 관행은 국내에선 발붙이기 어렵다. 운용사들은 회사 자금을 현금으로 들고 있거나 예금, 채권 등 안전자산으로 굴리고 있다. 자기 펀드에 투자하는 걸 기피한다. 펀드매니저도 예외가 아니다. 대부분 다른 회사 펀드에 돈을 맡긴다. 운용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일까.

남의 펀드 찾는 매니저들

금융감독원은 작년 5월 삼성·미래에셋 등 32개 자산운용사 대표에게 ‘자기운용펀드 투자 때 유의사항’이란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운용사가 자기 자본으로 투자할 수 있는 펀드를 적시한 게 골자다. 대표적으로 △인덱스(지수연동)형 △재간접형 △사모 부동산·특별자산형 △머니마켓펀드(MMF) 등이다. 주식형 등 일반 펀드엔 회사 돈을 넣지 말라는 경고였다.

펀드매니저들에게도 ‘친절한’ 지침을 내렸다. ‘매니저의 자기운용 펀드에 대한 투자 금지’ 등을 요구했다. “투자자 간 이해상충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란 게 금감원 측 설명이다. 펀드매니저가 사익을 위해 펀드를 악용할 소지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에 개인 돈을 넣었던 상당수 매니저들은 공문을 받은 즉시 대부분 환매했다고 한다. A사 매니저는 “철저한 사후 검증을 통해 이해상충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데 그런 조치가 없었던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소규모 펀드는 우후죽순

금융투자 업계에서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규제는 또 있다. 투자자문사들은 아무리 좋은 성과를 냈더라도 이 수익률을 바탕으로 마케팅할 수 없다. “과거 성과가 미래를 보장할 수 없지 않으냐”며 당국이 막고 있어서다. B자문사 대표는 “과거 수익률을 보여줘선 안된다는 게 당국의 지침인데, 그럼 고객들이 뭘 보고 돈을 맡기겠느냐”고 되물었다.

‘규제의 벽’이 높은데도 한국의 펀드 수는 세계 1위다. 현재 1만1372개로, 글로벌 역외펀드의 본고장 격인 룩셈부르크(9400개)보다도 많다. 이상한 점은 펀드 자산액만 보면 10위권에서 한참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유행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소규모 펀드들이 많다는 얘기다. 설정액이 10억원도 안되는 펀드는 총 3525개로, 전체의 31%나 된다.

순자산액이 적은 펀드는 수익률이 떨어지기 쉽다. 매니저들이 신경을 덜 쓰게 되고, 분산 투자도 어려워서다. 소비자 보호를 위한 개입은 정작 하지 않고 엉뚱한 규제를 적용한 결과다. 예컨대 미국에선 펀드마다 이사회를 둬야 한다. 펀드당 투자액이 적으면 운용사가 뒷감당하기 어려운 구조다. 대만에선 운용사들이 1년에 4개 펀드만 신설할 수 있다. 금융당국이 뒤죽박죽 규제를 하고 있다면 문제다.

조재길 증권부 차장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