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리베로
미래를 꿈꿀 수 없었던 한 소년이 있었다. 서울 명동 한복판 당구장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그곳에서 당시 야구계를 주름잡던 고교야구 선수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그 즐거움은 소년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데 하나의 힘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소년은 2013년 2월1일, 대한야구협회 21대 회장이 됐다. 아마추어 야구의 위기를 극복해주길 원하는 야구인들의 염원이 바탕이 됐다. 이렇게 난 마치 한국 야구계의 구원투수처럼 마운드에 등판했다.

구원투수는 위기의 순간 팀을 살리고 용기와 힘을 실어준다. 후방을 든든히 지키며 공수 양면에서 활약하는 ‘힘이 되는 존재’ 리베로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리베로 같은 리더십이 아닐까.

곳곳에 귀를 기울이자 아마추어 야구계의 답답한 현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구공 하나 없이 노란 고무공으로 연습하는 야구부가 있었고, 선수가 부족해 포지션을 메우지 못하는 야구부도 있었다. 야구장비 하나 들여오는 것조차 어려운 대부분의 지방 아마추어 팀에는 전국대회의 높은 문턱을 낮추는 작업이 필요했다. 야구부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2011년 도입된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진정 선수들의 미래를 키워나가는 장이 되도록 해야 했다. 그들의 애타는 목소리에 나는 기꺼이 야구계의 ‘리베로’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아마추어 야구의 심장이던 동대문야구장의 열기를 재현할 고척 돔구장이 고교야구의 새로운 심장이 될 준비를 마쳐가고 있다. 선수들은 봉황대기와 대한야구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야구대제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린다. 한국 야구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인 아마추어 야구가 희망찬 내일을 꿈꾸게 됐다.

내가 한국 야구계의 리베로 역할을 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위기 때마다 리베로가 있었다. 바로 국민들이다.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집에 있던 금을 들고 나왔던 시민 한 명 한 명이 그렇고, 이번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아낌없이 기부를 하고 또 자신의 생활을 접고 자원봉사에 뛰어든 이들이 그렇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리베로다. 주자 만루 후 어떠한 강타자가 나와도 흔들리지 않고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구원투수, 리베로를 기대해본다.

이병석 < 새누리당 국회의원 lbs@assembly.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