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운전기사서 인생역전, 이철희 기업銀 신당동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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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기사→보일러공→영업왕, 주경야독 29년 만에 이룬 꿈
'은행원의 꽃'이 되다
'은행원의 꽃'이 되다
지난 16일 기업은행 신당동지점. 인근 아파트 부녀회 회원 10여명이 지점장실에 모였다. 이철희 지점장(55·사진)의 초청을 받은 이들은 이 지점장이 직접 내온 차를 마시며 한 시간여 수다를 떨다 돌아갔다. 이 지점장은 이들에게 이틀 뒤인 18일 롯데백화점 청량리점에서 열리는 ‘IBK 노래마당’ 초대장을 나눠주고 참석을 부탁했다.
그날 오후 부녀회원 2명이 다시 지점을 찾았다. 그들은 예금 신규가입을 하고 돌아갔다. 이 지점장의 친절함에 반해서다. 사실 일반 고객이 은행 지점장실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거액 자산가들이나 들락날락하는 곳에 초대를 받았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지점장은 그렇게 영업을 하고 있다.
이 지점장은 180㎝의 훤칠한 키에 날씬한 몸매 덕분에 흰 와이셔츠와 넥타이, 검은 정장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가 정장을 입고 다닌 것은 불과 10여년밖에 안 된다. 공장과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은행 운전기사로, 다시 은행 보일러공에서 정식 은행원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길고 험난했다.
○막노동으로 시작한 사회생활
그는 1959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가난했던 탓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플라스틱공장에 취직했다. 1년간 일하며 모은 돈으로 다시 고향에 내려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장에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적어도 고등학교는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까지 졸업은 했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플라스틱공장에 들어갔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공사 현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일을 하다보니 인생이 비참해졌다. “어느 날 비가 와서 일을 쉬는데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대 후 운전면허를 땄다. 덕분에 한 가정집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열심히 일을 했고, 기업은행 운전기사 취직 추천을 받을 수 있었다. 1983년의 일이다.
그는 이명재 당시 기업은행 비서실장의 차를 몰았다. 고(故) 이 전 실장은 탤런트 이순재 씨의 형이다. “하루는 이 실장님이 롯데호텔을 가자고 했는데 제가 신라호텔로 갔습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실장님은 오히려 제 어깨를 다독여주셨죠.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행 보일러실에서 키운 은행원의 꿈
은행 비서실장 운전기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은행원을 많이 보게 됐다. 그렇게 은행원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대학도 안 나온 그가 은행원이 될 길은 없었다. 가장 빠른 길은 기술계 별정직으로 채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 안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89년 열관리기능사, 1990년 위험물취급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결국 1990년 별정직인 보일러기사로 기업은행에 취업했다. 7년간 7명의 비서실장을 모시며 공부한 끝에 얻은 결과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은행에서 과장까지 하겠다’고 목표를 제시하고 결혼에도 성공했다.
그는 기업은행 성동지점에서 보일러기사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다 보니 다시 꿈이 생겼다. ‘진짜 은행원’이 되겠다는 것이다. “기능사가 아니라 기사 자격증을 따면 ‘기술계 은행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근데 대학을 안 나오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인덕전문대 사무자동학과 야간과정에 입학했습니다.”
32세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낮에는 보일러를 고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1993년 대학을 졸업하고 1996년엔 열관리기사 자격증을 땄다. 덕분에 1998년 기술계 은행원이 됐다.
○마침내 은행 창구에 앉다
은행원이라고는 하지만 기술계 은행원은 무늬만 은행원이다. 금융을 모르기 때문에 창구에 앉을 수는 없었다. 대신 사무자동학을 전공한 덕분에 컴퓨터에는 자신 있었다. “당시 은행원들은 컴퓨터시험에 합격해야 대리로 승진할 수 있었어요.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직원들이 애를 먹었죠. 그래서 제가 직원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은행원들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진짜 은행 일을 하기 시작했다. 종이도 나르고, 서무 보조도 했다. 지점 체육행사도 도맡아 진행했다. 덕분에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피할 수 있었다. 하위직부터 잘리는 분위기였지만 지점의 어느 누구도 그가 나가기를 원치 않았다.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더 강해진 계기였습니다.”
은행 연수를 받으면서 업무 영역을 계속 넓혀가다 보니 어느새 창구에 앉을 수 있게 됐다. 2002년 개인 고객을 상담하게 된 것이다. “저는 다른 은행원들이 경험하지 못한 밑바닥 인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민 고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어요.”
40대 ‘행원’은 영업에는 탁월했다. “교사들을 위한 신용카드가 나왔어요.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매일같이 인근 학교들을 드나들었죠.” 처음에는 잡상인 취급을 받았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250명의 고객을 모았다. 덕분에 지역본부에서 카드유치 실적 1위까지 했다.
2005년에는 책임자(대리)로 승진했다. “젊은 은행원들에게 미안했어요. 그들이 승진해야 하는데 나이 많은 제가 승진을 했으니까요. 더 열심히 일해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자가 됐어도 보일러 일도 계속 봤어요. 두 사람 몫을 하려고요.” 이를 알게 된 조준희 당시 기업은행 부행장(전 기업은행장)은 그에게 보일러 일은 그만두라고 했다. 15년 가까운 ‘보일러 인생’은 그것으로 마감하게 됐다.
○29년 만에 이룬 ‘지점장’의 꿈
2011년 8월 성동지점 차장 시절. 그를 눈여겨보던 고객 중 한 명이 찾아왔다. 외국계 수처리 전문업체 사장이었다. 회사 자금관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그 사장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과거사’를 꺼냈다. “저 같은 놈에게 거액을 맡기시겠다고 하니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했어요.”
그 사장은 이 지점장의 얘기를 듣고 오히려 더 감복했다. 그래서 500억원을 맡겼다. 덕분에 이 지점장은 2011년 예금왕에 올랐고 2012년 1월 팀장으로 승진해서 당시 신당동출장소로 발령받았다.
그는 신당동출장소에서 ‘오방오콜’ 전략으로 영업을 뛰었다. 하루에 다섯 번은 고객을 방문하고, 다섯 명의 고객에게는 전화를 걸겠다는 의미에서 그가 지은 이름이다. 그의 활약 덕분에 2012년 7월 신당동출장소는 지점으로 승격됐다. 동시에 그가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운전기사로 은행에 들어온 지 29년 만의 일이다. 신당동지점은 지난해 실적 평가에서 모든 목표를 초과 달성해 ‘1등급’을 받았다.
그는 올해 55세다. 기업은행은 55세가 된 직원에게 임금피크제 또는 퇴직을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6개월을 유예받았다. 뛰어난 실적 때문이다. “꿈을 꾸고 계신가요? 꿈은 이뤄집니다. 사람은 하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 '은행원의 꽃' 지점장은
전국 6000여명…자기 이름으로 수표 발행도 가능
지점장은 은행원의 ‘꽃’으로 불린다. 모든 은행원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전국의 은행 지점장은 6000여명 정도다. 전체 은행원이 12만여명인 것을 감안하면 은행원 20명 중 1명가량이 지점장이다. 최근엔 은행원들도 고령화되면서 입행 동기 기준으로 보통 30% 정도만 지점장이 된다. 지점장 승진까지는 통상 20년이 걸린다. 나머지 70%는 부지점장(팀장) 정도에서 은행 생활을 마치게 된다.
지점장은 해당 점포의 주인이다. ‘지배인’ 신분으로 은행장을 대리해 모든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기업 거래 점포는 평균 자산(예금+대출)이 5000억원을 넘는다.
거액 대출은 은행 본점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차주의 신용도 및 담보 수준 등에 따라 지점장 권한으로 일정 금액까지는 대출을 할 수 있다. 금리도 지점장 전결로 깎아주거나 더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지점장들은 본인의 이름으로 수표를 발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지점장들은 본인의 이름이 찍힌 수표를 명예롭게 여기고 따로 보관하기도 한다.
화려해 보이지만 ‘실적 경쟁’은 지점장을 괴롭힌다. 매일 계수가 집계되고, 본부의 평가를 받는다. 각 은행은 비슷한 덩치와 영업 환경을 가진 지점들을 묶어 매달 실적을 평가한다. 여기서 살아남는 사람만 지역본부장이 되는 영광을 얻는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
그날 오후 부녀회원 2명이 다시 지점을 찾았다. 그들은 예금 신규가입을 하고 돌아갔다. 이 지점장의 친절함에 반해서다. 사실 일반 고객이 은행 지점장실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거액 자산가들이나 들락날락하는 곳에 초대를 받았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지점장은 그렇게 영업을 하고 있다.
이 지점장은 180㎝의 훤칠한 키에 날씬한 몸매 덕분에 흰 와이셔츠와 넥타이, 검은 정장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가 정장을 입고 다닌 것은 불과 10여년밖에 안 된다. 공장과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은행 운전기사로, 다시 은행 보일러공에서 정식 은행원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길고 험난했다.
○막노동으로 시작한 사회생활
그는 1959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가난했던 탓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플라스틱공장에 취직했다. 1년간 일하며 모은 돈으로 다시 고향에 내려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장에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적어도 고등학교는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까지 졸업은 했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플라스틱공장에 들어갔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공사 현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일을 하다보니 인생이 비참해졌다. “어느 날 비가 와서 일을 쉬는데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대 후 운전면허를 땄다. 덕분에 한 가정집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열심히 일을 했고, 기업은행 운전기사 취직 추천을 받을 수 있었다. 1983년의 일이다.
그는 이명재 당시 기업은행 비서실장의 차를 몰았다. 고(故) 이 전 실장은 탤런트 이순재 씨의 형이다. “하루는 이 실장님이 롯데호텔을 가자고 했는데 제가 신라호텔로 갔습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실장님은 오히려 제 어깨를 다독여주셨죠.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행 보일러실에서 키운 은행원의 꿈
은행 비서실장 운전기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은행원을 많이 보게 됐다. 그렇게 은행원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대학도 안 나온 그가 은행원이 될 길은 없었다. 가장 빠른 길은 기술계 별정직으로 채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 안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89년 열관리기능사, 1990년 위험물취급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결국 1990년 별정직인 보일러기사로 기업은행에 취업했다. 7년간 7명의 비서실장을 모시며 공부한 끝에 얻은 결과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은행에서 과장까지 하겠다’고 목표를 제시하고 결혼에도 성공했다.
그는 기업은행 성동지점에서 보일러기사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다 보니 다시 꿈이 생겼다. ‘진짜 은행원’이 되겠다는 것이다. “기능사가 아니라 기사 자격증을 따면 ‘기술계 은행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근데 대학을 안 나오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인덕전문대 사무자동학과 야간과정에 입학했습니다.”
32세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낮에는 보일러를 고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1993년 대학을 졸업하고 1996년엔 열관리기사 자격증을 땄다. 덕분에 1998년 기술계 은행원이 됐다.
○마침내 은행 창구에 앉다
은행원이라고는 하지만 기술계 은행원은 무늬만 은행원이다. 금융을 모르기 때문에 창구에 앉을 수는 없었다. 대신 사무자동학을 전공한 덕분에 컴퓨터에는 자신 있었다. “당시 은행원들은 컴퓨터시험에 합격해야 대리로 승진할 수 있었어요.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직원들이 애를 먹었죠. 그래서 제가 직원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은행원들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진짜 은행 일을 하기 시작했다. 종이도 나르고, 서무 보조도 했다. 지점 체육행사도 도맡아 진행했다. 덕분에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피할 수 있었다. 하위직부터 잘리는 분위기였지만 지점의 어느 누구도 그가 나가기를 원치 않았다.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더 강해진 계기였습니다.”
은행 연수를 받으면서 업무 영역을 계속 넓혀가다 보니 어느새 창구에 앉을 수 있게 됐다. 2002년 개인 고객을 상담하게 된 것이다. “저는 다른 은행원들이 경험하지 못한 밑바닥 인생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민 고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어요.”
40대 ‘행원’은 영업에는 탁월했다. “교사들을 위한 신용카드가 나왔어요.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매일같이 인근 학교들을 드나들었죠.” 처음에는 잡상인 취급을 받았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250명의 고객을 모았다. 덕분에 지역본부에서 카드유치 실적 1위까지 했다.
2005년에는 책임자(대리)로 승진했다. “젊은 은행원들에게 미안했어요. 그들이 승진해야 하는데 나이 많은 제가 승진을 했으니까요. 더 열심히 일해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자가 됐어도 보일러 일도 계속 봤어요. 두 사람 몫을 하려고요.” 이를 알게 된 조준희 당시 기업은행 부행장(전 기업은행장)은 그에게 보일러 일은 그만두라고 했다. 15년 가까운 ‘보일러 인생’은 그것으로 마감하게 됐다.
○29년 만에 이룬 ‘지점장’의 꿈
2011년 8월 성동지점 차장 시절. 그를 눈여겨보던 고객 중 한 명이 찾아왔다. 외국계 수처리 전문업체 사장이었다. 회사 자금관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그 사장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과거사’를 꺼냈다. “저 같은 놈에게 거액을 맡기시겠다고 하니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했어요.”
그 사장은 이 지점장의 얘기를 듣고 오히려 더 감복했다. 그래서 500억원을 맡겼다. 덕분에 이 지점장은 2011년 예금왕에 올랐고 2012년 1월 팀장으로 승진해서 당시 신당동출장소로 발령받았다.
그는 신당동출장소에서 ‘오방오콜’ 전략으로 영업을 뛰었다. 하루에 다섯 번은 고객을 방문하고, 다섯 명의 고객에게는 전화를 걸겠다는 의미에서 그가 지은 이름이다. 그의 활약 덕분에 2012년 7월 신당동출장소는 지점으로 승격됐다. 동시에 그가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운전기사로 은행에 들어온 지 29년 만의 일이다. 신당동지점은 지난해 실적 평가에서 모든 목표를 초과 달성해 ‘1등급’을 받았다.
그는 올해 55세다. 기업은행은 55세가 된 직원에게 임금피크제 또는 퇴직을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6개월을 유예받았다. 뛰어난 실적 때문이다. “꿈을 꾸고 계신가요? 꿈은 이뤄집니다. 사람은 하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 '은행원의 꽃' 지점장은
전국 6000여명…자기 이름으로 수표 발행도 가능
지점장은 은행원의 ‘꽃’으로 불린다. 모든 은행원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전국의 은행 지점장은 6000여명 정도다. 전체 은행원이 12만여명인 것을 감안하면 은행원 20명 중 1명가량이 지점장이다. 최근엔 은행원들도 고령화되면서 입행 동기 기준으로 보통 30% 정도만 지점장이 된다. 지점장 승진까지는 통상 20년이 걸린다. 나머지 70%는 부지점장(팀장) 정도에서 은행 생활을 마치게 된다.
지점장은 해당 점포의 주인이다. ‘지배인’ 신분으로 은행장을 대리해 모든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기업 거래 점포는 평균 자산(예금+대출)이 5000억원을 넘는다.
거액 대출은 은행 본점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차주의 신용도 및 담보 수준 등에 따라 지점장 권한으로 일정 금액까지는 대출을 할 수 있다. 금리도 지점장 전결로 깎아주거나 더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지점장들은 본인의 이름으로 수표를 발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지점장들은 본인의 이름이 찍힌 수표를 명예롭게 여기고 따로 보관하기도 한다.
화려해 보이지만 ‘실적 경쟁’은 지점장을 괴롭힌다. 매일 계수가 집계되고, 본부의 평가를 받는다. 각 은행은 비슷한 덩치와 영업 환경을 가진 지점들을 묶어 매달 실적을 평가한다. 여기서 살아남는 사람만 지역본부장이 되는 영광을 얻는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