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압선을 받쳐들고 서서 전선을 넘겨줄 때
나는 한국전력공사 배전운영처의 기물이었다
정강이에 파스처럼 광고지를 붙이고 서 있을 때
새들에게 집을 분양할 때
나는 원기둥 시멘트 구조물이었다

추운 밤 겨울은 깊고 당신
술에 취해
내가 등(燈)을 들고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걸어와 부딪히더니

어머니인 줄 알고
떠나려는 연인인 줄 알고
잡히지 않는 꿈인 줄 알고
이 신간을 부여안고 엉엉 울 때
비로소 나는 영장류의 형상을 입어
그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시집 《쌍칼이라 불러다오》中


어릴 적 골목에서 놀 때도, 이별하는 길에 우뚝 멈춰 눈물 흘릴 때도, 홀로 계신 어머니를 뒤로 한 채 도시로 나설 때도 그 회색 기둥은 묵묵히 서 있었습니다. 가체처럼 전선을 머리에 올린, 이젠 흉물이란 손가락질에 개수를 줄이겠다는 말까지 듣는 신세지만, 전봇대 한 주는 아직도 마음속에 서 있습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