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 눈에 비친 6·25, 붓끝에 녹아든 참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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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정준모 씨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 출간
소달구지를 끌고 피란길에 오른 가족. 가장이 고삐를 잡고 부인과 두 아이는 달구지 위에 올라탔다. 포성이 지축을 뒤흔드는 전쟁터이지만 가족이 함께하기에 피란길은 그리 슬퍼 보이지 않는다. 이중섭이 그린 ‘길 떠나는 가족’은 절망 속의 희망이다.
박영선의 유화 ‘파괴된 서울’은 동족상잔이라는 참담한 비극의 현장을 증언한다. 전쟁은 건물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똬리를 틀었던 가족의 행복과 아름다운 기억마저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화가는 그 비극의 현장을 희망의 푸른색으로 채색했다. 아픔을 딛고 잊어버린 낙원을 재건하자고 외치고 있다.
한국 근대사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 속에서도 화가들은 여전히 붓을 놓지 않았다.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고 한 차원 높은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전쟁 때 대부분의 화가들이 붓을 꺾고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비판도 많다. 그것은 과연 사실일까.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최근 펴낸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화가들이 기록한 6·25’(마로니에북스 펴냄)를 통해 그 답을 구하고 있다.
“정치적 관점과 이해득실에 따라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고 현실 참여 여부만이 평가의 척도가 되는 현실이 안타까워 책을 내게 됐다”는 그는 그간 가려져 왔거나 우리가 몰랐던 화단의 진실을 파헤친다.
주목을 끄는 대목은 피란을 가지 못한 잔류파 화가들의 활동. 저자는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이상범 등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 중 일부는 서울 명동 마루젠백화점 1층에서 주먹밥을 먹어가며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는 등의 선전화 제작에 동원됐고 일부는 ‘조선직업동맹 전국평의회문화사업부’에서 미제구축궐기대회와 선무공작을 위한 포스터와 전단을 대량으로 제작·배포하는 일을 해야 했다.”(20쪽)
피란지 부산에서 화가들의 삶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박수근 등은 미군부대 앞에서 초상화를 그렸고 김은호, 변관식, 장우성 등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대한경질도기주식회사에서 장식용 접시에 그림을 그렸다. 이런 시련 가운데서도 화가들의 예술혼은 뜨겁게 타올라 부산 광복동 다방거리에서는 크고 작은 전시회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는 종군 화가단의 활약과 그들이 남긴 작품, 월북 화가들의 행적 등도 함께 수록됐다.
저자는 “6·25전쟁을 기록한 작품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며 “이 책이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박영선의 유화 ‘파괴된 서울’은 동족상잔이라는 참담한 비극의 현장을 증언한다. 전쟁은 건물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똬리를 틀었던 가족의 행복과 아름다운 기억마저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화가는 그 비극의 현장을 희망의 푸른색으로 채색했다. 아픔을 딛고 잊어버린 낙원을 재건하자고 외치고 있다.
한국 근대사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 속에서도 화가들은 여전히 붓을 놓지 않았다.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고 한 차원 높은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전쟁 때 대부분의 화가들이 붓을 꺾고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비판도 많다. 그것은 과연 사실일까.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최근 펴낸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화가들이 기록한 6·25’(마로니에북스 펴냄)를 통해 그 답을 구하고 있다.
“정치적 관점과 이해득실에 따라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고 현실 참여 여부만이 평가의 척도가 되는 현실이 안타까워 책을 내게 됐다”는 그는 그간 가려져 왔거나 우리가 몰랐던 화단의 진실을 파헤친다.
주목을 끄는 대목은 피란을 가지 못한 잔류파 화가들의 활동. 저자는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이상범 등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 중 일부는 서울 명동 마루젠백화점 1층에서 주먹밥을 먹어가며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는 등의 선전화 제작에 동원됐고 일부는 ‘조선직업동맹 전국평의회문화사업부’에서 미제구축궐기대회와 선무공작을 위한 포스터와 전단을 대량으로 제작·배포하는 일을 해야 했다.”(20쪽)
피란지 부산에서 화가들의 삶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박수근 등은 미군부대 앞에서 초상화를 그렸고 김은호, 변관식, 장우성 등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대한경질도기주식회사에서 장식용 접시에 그림을 그렸다. 이런 시련 가운데서도 화가들의 예술혼은 뜨겁게 타올라 부산 광복동 다방거리에서는 크고 작은 전시회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는 종군 화가단의 활약과 그들이 남긴 작품, 월북 화가들의 행적 등도 함께 수록됐다.
저자는 “6·25전쟁을 기록한 작품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며 “이 책이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