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 수니파 무장단체(ISIS)에 의한 내전으로 이라크가 권력의 진공상태에 빠져들면서 세계 최대 유랑민족 쿠르드인들의 독립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KRG)의 마수드 바르자니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CNN방송 앵커 크리스티안 아만푸어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는 명백히 분열돼 있고, 쿠르드인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시간이 왔다”며 이라크 정부로부터 독립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KRG는 이미 지난 12일 자체 군사조직인 ‘페슈메르카(죽음을 각오한 사람들)’를 동원, 이라크 북부의 키르쿠크 유전을 장악한 데 이어 독자적인 원유 수출에도 나서고 있다. 이라크 내전의 최대 수혜자는 쿠르드족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內戰 틈탄 쿠르드 "이라크서 독립하겠다"
○“쿠르드 미래 스스로 결정하겠다”

바르자니 대통령은 “지금 우리는 2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라크에 살고 있다”며 “독립 추진을 위해 주민투표도 실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라크 내전 후 KRG는 이라크 북부지역을 벗어나 서쪽 접경지역인 라비아와 동남쪽 잘룰라를 장악하는 등 기존 관할지역보다 통제 범위를 40% 이상 늘린 상태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마수드 바르자니 쿠르드 자치정부 대통령을 24일 아르빌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만나 얘기하고 있다. 아르빌AFP연합뉴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마수드 바르자니 쿠르드 자치정부 대통령을 24일 아르빌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만나 얘기하고 있다. 아르빌AFP연합뉴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24일 KRG의 수도 아르빌을 방문해 바르자니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ISIS에 대항하기 위해 이라크 정부에 협력해 달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바르자니 대통령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며 이를 거절했다.

‘쿠르디스탄(쿠르드인의 땅)’ 건국이 속도를 내면서 이라크가 수니파 중심의 서북부와 쿠르드족의 동북부, 시아파 현 정부 세력의 동남부 등으로 3분할될 것이라는 전망도 확산되고 있다.

3000년 가까이 이렇다 할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온 쿠르드족은 이번 내전을 100여년 만에 다시 찾아온 독립 기회로 보고 있다. 1920년 8월10일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동맹국 중 하나인 오스만튀르크제국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운 연합국이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면서 당시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쿠르드족의 독립을 명시했다. 하지만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 등장한 터키와 연합국이 1923년 로잔조약을 맺으면서 세브르 조약은 폐기됐다. 이후 영국은 안정적인 석유 확보를 위해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모술 일대를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이라크에 편입했다.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쿠르드족이 여러 국가로 흩어진 배경이다.

○풍부한 유전이 자금줄

포브스는 23일 KRG가 독자적인 원유 수출로 확보하는 현금을 통해 페슈메르카의 전력을 크게 증강시킬 수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KRG의 세력이 미치는 키르쿠크 등을 포함한 이라크 북부 유전지대는 이라크 석유 매장량의 17%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블룸버그 등 외신들은 KRG가 터키의 세이한 항구를 통해 이스라엘에 원유를 수출했다고 보도했다. 이라크 원유가 이스라엘에 수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도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에 소규모로 원유를 수출했지만 판로를 넓힌 것이다. 터키 국영 할크뱅크가 이번 원유 수출 대금을 승인했으며, 총 9300만달러의 자금이 쿠르드 자치정부 계좌에 예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터키 정부와는 올해 초 원유 수출과 관련한 50년 계약을 맺었다.

○ISIS·이라크 정부 협공에 나설 수도

그러나 쿠르드의 독립이 요원할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이라크 정부는 물론 ISIS가 쿠르드 독립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당장 이스라엘에 대한 원유 수출이 이슬람 국가들을 자극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이날 “바그다드 정부가 ISIS 공격을 받을 때보다 KRG의 이스라엘에 대한 원유 수출에 더 격앙했다”며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ISIS도 이라크 정부에 집중된 공격을 쿠르드 쪽으로 돌릴 수 있다”고 전했다. 실제 ISIS는 이라크 내전을 촉발하기 한 주 전에도 디얄라 지역의 쿠르드 정당 사무실을 공격, 18명을 죽였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다.

중동전문가인 케일살리는 뉴욕타임스에 “쿠르디스탄과 ISIS가 현재 1000㎞ 길이의 국경을 맞댄 채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다”며 “독립 대신 이라크 정부에 협조하면서 실리를 취하는 것이 이득일 수 있다”고 말했다.

■ 쿠르드族은
세계 최대 유랑민족…중동 일대 3000만명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 쿠르드족은 기원전 9세기 이란 서부 자그로스 산맥 일대에 세워진 메디아 왕국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 아랍, 몽골의 지배를 받다 16세기 이후엔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흡수됐다. 오스만튀르크 제국 멸망 후 현재 이라크를 비롯해 터키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3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오랜 기간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지만 동화되지 않고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인종적으로는 이란계 백인이고 언어는 페르시아어와 비슷한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인종적으론 아랍계인 이라크인보다 이란인에 가깝다.

7세기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수니파로 분류된다. 이슬람교와 쿠르드족의 이해가 상충될 때는 민족을 우선순위에 둘 정도로 혈연의식이 강하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쿠르드 반군을 제거하기 위해 화학무기를 사용해 수만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