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화 "색깔의 영혼 찾아 미술인생 50년 바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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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부터 회고전 여는 '단색화 거장' 정상화 화백
갤러리현대에서 45점 선봬
"80대에도 끝없는 실험…나는 영원한 청년 작가"
갤러리현대에서 45점 선봬
"80대에도 끝없는 실험…나는 영원한 청년 작가"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다가서려는 욕구가 저를 단색 추상화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 화백(83)이 추상화에 도달하게 된 동기는 생각보다 단순 명료했다. 다음달 1일부터 한 달간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정 화백을 26일 미술관에서 만나 작품세계를 들어봤다. 그는 이번 전시에 1970년대 이후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45점을 출품한다.
정 화백은 서울대 회화과 재학시절 미국 대사관에서 본 라이프 잡지의 컬러 화보를 통해 서양 현대미술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됐다고 한다. “잡지 속에서 발견한 추상화의 조형과 컬러가 묘하게도 제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그는 1950~196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상황과 정신적 분위기를 심층적으로 표현하는 데 서구의 앵포르멜(추상회화의 한 경향)이 적합하다고 판단해 추상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위 그룹에 가담해 다양한 재료와 색채의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서울예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67년 훌쩍 파리로 떠났다. “교과서에서 본 그림들을 직접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는 그는 이때부터 1992년까지 25년간 프랑스와 일본에 머물며 의욕적으로 작품활동을 펼쳐 나갔다. 최종 결과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그만의 단색화의 세계를 구축한 것도 이 시절이었다.
정 화백의 작업은 시간과의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캔버스 위에 고령토로 초벌칠을 해 말린 다음 캔버스를 규칙적인 간격으로 가로 세로로 접어 고령토를 들어내고 그 빈자리를 물감으로 채우는 작업을 6~7회 반복한다”는 그는 작품 한 점 하는 데 1년이 걸릴 때도 있다고 말한다. 마치 고려청자를 빚을 때 태토를 긁어내고 그 자리에 검정 혹은 흰색 흙을 메우는 상감기법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그것을 ‘뜯어내기’와 ‘메우기’로 설명한다.
그의 그림은 얼핏 보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단색의 면처럼 보인다. “처음에 제 작품을 본 사람들이 그림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더군요. 자세히 보면 거기에 선도 있고 면도 있고 네모꼴 균열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형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말이죠.”
최근 해외 경매시장에서 1970년대 한국 단색화가 주목받고 있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당연한 현상”이라며 “명품은 빛을 보는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진가를 드러내기 마련”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현대미술의 요체는 실험정신”이라는 그는 요즘 젊은 세대의 실험정신 부족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젊은 시절 실패한 실험들을 목록으로 작성해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요즘도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친다는 정 화백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직 젊은가 보다”라며 활짝 웃었다. 최근 들어서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는 그는 여전히 청년임이 분명하다. (02)2287-3500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한국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 화백(83)이 추상화에 도달하게 된 동기는 생각보다 단순 명료했다. 다음달 1일부터 한 달간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정 화백을 26일 미술관에서 만나 작품세계를 들어봤다. 그는 이번 전시에 1970년대 이후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45점을 출품한다.
정 화백은 서울대 회화과 재학시절 미국 대사관에서 본 라이프 잡지의 컬러 화보를 통해 서양 현대미술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됐다고 한다. “잡지 속에서 발견한 추상화의 조형과 컬러가 묘하게도 제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그는 1950~196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상황과 정신적 분위기를 심층적으로 표현하는 데 서구의 앵포르멜(추상회화의 한 경향)이 적합하다고 판단해 추상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위 그룹에 가담해 다양한 재료와 색채의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서울예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67년 훌쩍 파리로 떠났다. “교과서에서 본 그림들을 직접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는 그는 이때부터 1992년까지 25년간 프랑스와 일본에 머물며 의욕적으로 작품활동을 펼쳐 나갔다. 최종 결과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그만의 단색화의 세계를 구축한 것도 이 시절이었다.
정 화백의 작업은 시간과의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캔버스 위에 고령토로 초벌칠을 해 말린 다음 캔버스를 규칙적인 간격으로 가로 세로로 접어 고령토를 들어내고 그 빈자리를 물감으로 채우는 작업을 6~7회 반복한다”는 그는 작품 한 점 하는 데 1년이 걸릴 때도 있다고 말한다. 마치 고려청자를 빚을 때 태토를 긁어내고 그 자리에 검정 혹은 흰색 흙을 메우는 상감기법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그것을 ‘뜯어내기’와 ‘메우기’로 설명한다.
그의 그림은 얼핏 보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단색의 면처럼 보인다. “처음에 제 작품을 본 사람들이 그림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더군요. 자세히 보면 거기에 선도 있고 면도 있고 네모꼴 균열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형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말이죠.”
최근 해외 경매시장에서 1970년대 한국 단색화가 주목받고 있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당연한 현상”이라며 “명품은 빛을 보는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진가를 드러내기 마련”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현대미술의 요체는 실험정신”이라는 그는 요즘 젊은 세대의 실험정신 부족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젊은 시절 실패한 실험들을 목록으로 작성해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요즘도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친다는 정 화백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직 젊은가 보다”라며 활짝 웃었다. 최근 들어서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는 그는 여전히 청년임이 분명하다. (02)2287-3500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