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달라졌다. 과거 아젠다만 무수히 양산하던 일본 정부가 이제는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는 자세다. 엊그제 최종 확정됐다는 이른바 아베노믹스의 세 번째 화살, ‘성장전략’이 그 좋은 사례다.

우선 과거와 달리 방향성이 분명하다. 첫 번째 화살(재정지출), 두 번째 화살(양적완화)에 이어 세 번째 화살 ‘성장전략’으로 간다는 게 국민들 눈에도 그럴듯하게 비치는 모양이다. 정부가 경제를 살리는 데 전념한다는 일관성도 돋보인다. ‘감세’와 ‘규제완화’라는 메시지 역시 강렬하다. 그거야말로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그래서인지 추진 과제들도 법인세 인하를 필두로 노동, 농업, 의료개혁 등 시장친화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로 추려진 느낌이다. 그동안 일본 경제를 짓눌러왔다는 6중고(엔고, 높은 법인세, 과중한 인건비 부담, 규제, FTA 체결 지연, 전력수급 불안 등)를 확 날리자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권마다 벌이는 아젠다 게임

반면 우리는 반대로 가는 기분이다. 되는 일도 없이 정권마다 아젠다 게임만 벌이고 있다. 아젠다가 얼마나 난무했으면 이제는 방향성도, 메시지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을 정도다. 현 정권만 해도 그렇다. 경제민주화를 놓고 오락가락했던 건 제쳐 두자. 대통령직 인수위가 내놓은 5대 국정목표, 21대 추진전략, 140개 국정과제를 기억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나.

3대 목표, 6대 전략, 24개 추진과제라는 거창한 창조경제 실현계획도, 13대 미래성장동력도 희미해진 지 오래다. 심지어 올해 초 발표된 경제혁신 3개년 계획도 다를 게 없다. 3대 전략, 15개 핵심과제, 100개 실행과제에서 그나마 줄였다는 게 3대 전략, 10개 핵심과제(9+통일대박), 59개 실행과제다. 현란한 숫자에 그저 머리만 아팠다는 기억뿐이다.

지금은 세월호 사고로 ‘국가개조’ ‘안전혁신’ 등 엄청난 아젠다 홍수까지 이미 예약된 마당이다. 불과 정권 1년여 만에 나온 아젠다가 이 정도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아젠다가 또 쏟아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국민이나 기업이 벌써부터 아젠다 피로증을 호소하는 것도 당연하다.

‘선택과 집중’에 대한 오해

이 땅에서 ‘정부가 할 일(agenda)’과 ‘정부가 할 수 없는 일(non-agenda)’의 경계선은 아예 없는 것인가. 공리주의자로 유명한 제레미 벤덤은 “아젠다는 없다”고 했다지만 우리는 그 반대다. “논-아젠다는 없다”고 해야 딱 맞다. 무슨 일만 생기면 모든 게 정부로 향하고, 정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젠다를 뚝딱 생산한다.

‘선택과 집중’도 선진국과 우리는 완전히 거꾸로다. 선진국의 ‘선택과 집중’은 과거 무소불위로 치달았던 큰 정부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히 털어내고 꼭 해야 할 일만 하자는 전략이다. 그럴수록 아젠다는 더욱 힘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과 집중’은 아젠다의 무한 팽창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결과 이제는 논-아젠다까지 죄다 정부 영역으로 편입돼 버린 양상이다.

아젠다 난립으로 인한 폐해는 이미 심각하다. 이대로 가면 정부가 진짜 해야 할 아젠다마저 더 이상 추동력을 갖기 어렵다. 규제개혁이니, 공공기관 개혁이니 하는 것들이 정권마다 반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가 비전을 제시하려면 아젠다부터 대폭 정비해라.

안현실 경영과학博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