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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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0년대 한국 경제는 ‘개방과 자율의 시대’였다. 중화학공업 체제로 전환해 전후 복구와 발전에 주력하던 한국 경제는 1980년대 들어 개방의 물결과 마주친다. 외자를 들여 공장을 짓고 수출에 집중하던 방식은 짧은 기간 큰 발전을 이뤘지만 살인적 물가 상승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자본을 제공한 국가들이 한국 경제가 문을 열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 때문에 물가를 안정시키며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책마을] 도약의 80년대…"기적은 만들어 낸 것"
당시 정책 입안자로서 핵심 역할을 했던 강경식 전 부총리, 사공일·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 문희갑 전 청와대 경제수석, 서영택 전 국세청장·건설부 장관, 김기환 전 상공부 차관이 한국 경제사의 ‘증언자’로 나섰다. 《코리안 미러클 2 :도전과 비상》은 1980~1990년대 한국 경제 발전 상황을 1인칭 시점에서 조명하는 시도다. 전직 경제 관료 모임인 ‘재경회’가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함께 발족한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가 지난해 펴낸 《코리안 미러클》의 후속작이다.

강경식 전 부총리는 1970년대 후반 경제 상황을 “성장에서 안정으로, 보호 육성에서 개방과 경쟁으로, 민간 경제 활동에 대한 정부 개입을 없애고 기업 투자나 가격 결정을 기업이 스스로 하도록 접근해야 했던 시기였다”며 “민간 중심으로 경제 체질이 바뀌어야 품질 개선과 해외 수출 확대를 통해 경제가 제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1980년 석유파동을 극복하고 오늘날 시장경제의 토대를 구축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1966년 3월 국세청이 설립되자 이낙선 초대 국세청장은 ‘징세행정 강화로 내국세 규모를 700억원까지 높이겠다’고 공언하며 세정(稅政) 확립에 나섰다. 그해 9월 국세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서영택 전 국세청장의 ‘007 가방’ 이야기는 지금 들으면 웃을 수 있지만 나라 살림이 여유롭지 않았던 당시 세수 확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조사 요원들에게 가방을 하나씩 사 줬는데 그 가방이 007 가방이었어요. 거꾸로 하면 700이 되잖아요? ‘세수 700억원 목표’를 달성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가 강도 높게 징세 행정을 추진해서 그해 세수 목표 705억원을 달성했습니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KDI 연구위원으로 일하다 1983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발탁된 이후 제5공화국 마지막 재무장관과 제6공화국 초대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며 부실기업 정리와 금융자율화, 대외시장 개방정책 등 자율·개방시대 경제정책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당시 재무부 간부회의나 조회 등에서 이렇게 강조했다고 한다.

“한국 경제는 축구로 치면 전반전이 끝나고 이제 후반전에 들어와 골대가 바뀌었다. 그런데도 전반전 생각을 하고 공을 차면 자살골을 넣는다. 이제 경제정책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시장 개방도 남의 압력에 의해 못 이겨 할 일이 더 이상 아니다.”

1980년대 호황이 오로지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골프 선수인 게리 플레이어는 뛰어난 벙커샷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우승했어요.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연습을 많이 하니 운이 좋아졌다’고 말했다더군요.” 한국 경제가 그만큼 경제 발전을 준비했기 때문에 3저가 호황의 발판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규성 전 장관의 금융시장 개혁, 문희갑 전 경제수석이 들려주는 5공 예산개혁 과정, 김기환 전 차관의 대외개방 정책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 경제가 얼마나 숨가쁘게 달려왔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경제 기자로 평생을 보내며 당시 경제 현장을 취재했던 이계민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을 비롯해 이현락 전 동아일보 주필, 김강정 전 목포MBC 사장, 홍은주 전 MBC 논설주간 등 언론인 출신 집필진이 경제 관료들의 생생한 증언을 이끌어내고 정리했다.

6·25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나라가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한국 경제 발전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거를 모르고 어찌 현재와 미래를 논할까.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