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1914년 6월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탄에 피살됐다. 이에 격분한 오스트리아가 7월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양국의 충돌은 동맹국들의 싸움으로 번져 나갔고, 곧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렸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인 제1차 세계대전이 그렇게 터졌다.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파헤쳐보면 매우 다양한 것이 나온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 원인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끈 경제사상에 있다. 사실 나폴레옹 전쟁(1815) 후 제1차 세계대전(1914)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00년 동안은 전쟁의 참혹함이 거의 없던 시기다. 자유무역, 사유재산, 제한된 정부를 기본적인 이념으로 하는 자유주의의 전성기로서 현대 유럽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 자유주의 사상이 19세기 말부터 보호무역, 정부개입, 큰 정부를 기초로 하는 경제적 국수주의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가주의였던 중상주의의 오류를 지적하며 자유기업과 자유무역을 주창했다. 그리고 1812년 비교우위에 기초를 둔 데이비드 리카도의 자유무역이론에 따라 1846년 그 유명한 곡물법(Corn Law)과 1854년 항해조례가 철폐됐다. 이런 조치들은 영국 경제를 자유경제로 전환시켰고 산업혁명으로 일어난 경제를 더욱 발전시켰다. 영국의 경험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이 영국의 모형을 따르면서 자유무역시대가 열렸다.

국부·평화 지키는 원천은 무력 아닌 무역
국가 간 무역으로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더욱 가까워졌고 상호 존중과 우의가 돈독해졌다. 사람들은 자발적 거래가 쌍방 모두에게 이익을 주고 국가의 부를 증진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를 늘리는 방법이 정복과 전쟁이 아닌 무역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많은 국가가 중상주의의 경제적 국수주의를 버리고 전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은 분업을 통한 자발적 거래를 깨뜨려 모두에게 손해를 끼친다. 목축업을 하는 마을과 벼농사를 하는 마을이 서로 자신들이 생산하는 것을 교환해 생활하다 전쟁을 한다면 한쪽에서는 육류를 섭취하지 못하고 다른 쪽에서는 쌀을 먹지 못하게 돼 서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충족하기 위해 세계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고 있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브라질, 설탕은 태국, 육류는 호주, 와인은 칠레, 가죽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공급받는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물을 이것들과 교환하면서 세계 여러 지역에 공급한다. 이런 분업은 경제를 성장시키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그런데 이 분업은 평화가 지속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서로 교환을 하는 국가 간에는 전쟁을 하지 않으려는 인센티브가 있다. 자유무역이 평화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1870년대 이후 자유무역에 역행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선두 주자가 독일이었다. 독일은 보호무역 조치를 취했고 경제적 국수주의로 돌아갔다. 프랑스 역시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프랑스 내 외국인 투자를 억제하는 것은 물론 해외투자를 통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랫동안 자유무역을 유지해왔던 영국조차 해외투자를 억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적대적인 세력들이 극단으로 치달아 충돌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자유주의자들은 커피를 얻기 위해서는 커피를 생산하는 국가에 자국의 상품을 수출하는 자유무역을 주장한다. 국수주의자들은 국민의 복지를 개선시키는 방법이 자원이 풍부한 국가를 복속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커피를 얻기 위해 채택한 방법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커피 생산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민족적 자긍심과 함께 시기와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경제문제를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여기에 설득 당한 독일인들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유주의가 아닌 나치즘을 선택했다. 평화가 아닌 전쟁을 선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그것이다.

자유시장경제의 세계에서 민간에 의한 무역은 민간들 간 사적인 문제다. 어떤 마찰이 생기면 그것은 민간 기업들 간 문제다. 따라서 국가 간의 정치적 마찰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주의 국가 세계에서는 무역은 정부의 일이 되며 무역마찰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게 된다. 20세기에 전쟁이 일어났던 것은 바로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목표로 하는 정부 때문이었다.

자유무역과 평화의 관계는 최근의 실증연구들에서도 확인된다. 2004년 미국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대의 패트릭 맥도날드 교수는 1960~2000년의 국가 간 국제관계를 실증 분석해 자유무역과 갈등 간에 음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줬다(‘자유무역 또는 무역을 통한 평화’, 분쟁해결저널). 에릭 가르츠키 역시 2005년 비슷한 결과를 발표했다(‘세계의 경제적 자유:2005년 연차보고서’, 미 CATO연구소). 자유무역 국가들은 전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각국의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이 클수록 전쟁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최근 보호무역의 조짐과 각국의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이 점점 커져가는 것은 세계 평화에 대한 위험요소다. 세계 평화를 위해 자유무역과 확고한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전쟁 뒤엔 리스트의 사상이…

러시아 경제 성장을 수출 기회가 아닌 獨에 대한 위협이라 여겨


제1차 세계대전의 근본 원인이 된 경제사상의 원조는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다.

리스트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과 작은 정부는 당시 영국과 같은 강대국을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제활동의 단위로 개인만을 중시하면서 개인을 곧바로 보편적인 인류 사회로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이며, 개인과 인류 사이에는 국가가 존재하고 국가의 이익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가 인위적인 자본 배분을 통해 산업을 육성하고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외국 무역을 보호하는 데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특히 독일에서 그 영향이 컸다. 1878년께 자유무역이 쇠퇴하고 리스트가 주장한 정책들이 채택됐다. 독일이 급격히 발전해 1900년께 세계 2위 철강 생산국과 최대 화학제품 생산국이 될 만큼 이 정책들은 처음엔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위적인 자본 배분정책에 의한 잘못된 투자로 과잉생산이 초래됐다. 한편 세금, 관세 등으로 인한 내수 침체로 문제가 더욱 악화됐다. 수출에서 탈출구를 찾으려고 했지만 이탈리아, 러시아 등 많은 국가가 독일의 성공을 모방해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하며 독일 제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품을 해외에 팔기도 어려웠다. 국가 간 갈등도 증폭됐다.

리스트의 사상은 무역을 상호이익의 협동과정으로 보지 않고 승자와 패자의 싸움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독일 지도자들은 1890년대 러시아의 성장을 기회가 아닌 위협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독일을 주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발칸국가들과 관세동맹을 결성하고, 식민지와 대양함대를 구축하며 대응했다. 이와 같은 독일의 행동에 다른 강대국 역시 똑같이 적대적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발칸반도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돌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즘 역시 그 근간에 리스트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