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누군가는 먼저 가야 하는 길에 첫발을 내디디려 합니다.”

지난 5월7일 한화투자증권 고객들에게 ‘최고경영자(CEO) 서신’이 발송됐다. 200자 원고지 20여쪽 분량의 이 서신은 “국내 증권사들은 고객보다 회사의 이익이 먼저였다”는 뜻밖의 고해성사로 시작했다. ‘소신과 강단’으로 유명한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가 ‘고객중심 경영’을 위해 혁신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달로 취임 1년을 맞은 주 대표의 과감한 ‘실험’은 여의도 증권가에 수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다. 말로만 ‘고객중심 경영’을 외치며 대형 증권사들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실천계획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어서다. ‘수수료 장사’에만 매달리다 고객 신뢰를 잃고 위기에 빠진 증권산업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평가다. 한화의 이 같은 시도가 증권업계에 어떤 선순환을 가져올지 관심이다.

과당매매 유인 없애

한화투자증권의 실천계획 중 증권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과당매매 금지’다. 고객자산을 불리기보다 빈번한 거래를 일으켜 수수료 수익을 늘리는 일이 국내 증권사들의 수익창출 통로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고백한 것이다. 과당매매는 개인투자자들의 투자수익률이 기관투자가나 주가지수 수익률에 미치지 못하게 만든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국내 개인투자자들이 증권사에서 발길을 돌린 한 배경으로 지목돼왔다.

한화투자증권은 과당매매를 막기 위해 과도한 주식 매매에서 나오는 직원들의 실적을 아예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고객이 맡긴 주식 자산의 평잔 대비 오프라인 매매금액이 분기별 200%, 연간 300%를 초과하는 수수료 수익은 영업직원이나 지점 실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방침이다. 오프라인 매매가 과당매매와 연결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의미다. 증권업계에서도 종종 과당매매 폐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구체적 실천계획을 내놓은 회사는 지금까지 한화투자증권이 유일하다.

매매 수수료 수입을 기준으로 지급하던 개인 성과급 제도 역시 폐지했다. 대신 △고객만족도 △고객자산 증대 △비용 효율성을 기준으로 지점별 성과급을 지급하기로 했다. 증권사 직원들이 수수료 선취형 펀드나 고(高)보수 상품 판매에 열을 올리거나 불필요한 환매를 유도해온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서다. 직원들이 고객 자산 증대를 위해 더 좋은 투자 정보와 상담 능력을

추는 데 중점적으로 노력하라는 게 주 대표의 주문이다. 자발적인 역량 강화를 회사 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해 직원 1인당 교육 예산을 종전의 네 배인 300만원 수준으로 늘렸다.

매도 리포트 의무화

증권업계 경영 측면에서 과당매매 금지가 관심을 끌고 있다면 주식시장에선 ‘매도 의견’ 리포트가 이슈다. 한화투자증권은 리서치 부문에서도 고객이 원하는 공정한 정보를 생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애널리스트들의 매도 의견 리포트 작성을 아예 의무화했다. 올 들어서만 현대미포조선, KDB대우증권, LG생명과학, GS 등 대기업들에 대한 ‘매도 의견’을 쏟아냈다. 반면 올 들어 다른 증권사들이 낸 ‘매도 의견’은 전무하다.

증권사들은 잠재 고객인 기업과의 관계를 고려해 ‘매도 의견’을 내는 일을 꺼려왔다. 따라서 ‘매도’라고 쓰는 대신 에둘러서 ‘중립’이나 ‘보유’로 표현하는 게 업계의 오랜 관행이었다. ‘중립이라 쓰고 매도로 읽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담당 업종에서 반드시 매도 의견을 내라는 주 대표의 ‘엄명’은 파격적이란 반응이다. 나아가 중립 또는 매도 의견을 전체 리포트의 40%까지 맞춘다는 계획이다.

한화투자증권은 기관투자가만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던 리서치 정보도 지점 직원들이 공유하는 방식으로 바꿀 계획이다.

유행상품도 안 팔아

지난 5월 한화투자증권은 장기투자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레버리지 펀드’의 신규 판매를 중단한다고 선언해 다시 한 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레버리지 펀드란 파생금융상품을 활용해 기초지수의 상승 또는 하락 시 손익이 1.5~2배로 커지도록 설계한 상품이다.

지난 3월에는 잘 아는 펀드만 판매하겠다는 철학을 반영한 ‘코어펀드’ 개념을 새로 만들었다. 장기투자에 적합한 상품을 자체 분석기준으로 걸러낸 뒤 자산운용사 운용본부장(CIO), 펀드매니저와 심층 면담까지 거친 알짜 펀드 개념이다. 보수와 매매수수료 등 총비용도 살펴 고비용 구조를 원칙적으로 배제했다. 이렇게 1차로 13개 펀드를 선정한 뒤 그 수를 점차 늘려갈 계획이다.

오는 14일부터는 오프라인 거액 주식매매 수수료를 대폭 삭감할 방침이다. 거액 주문이라고 해서 서비스 비용이 훨씬 많이 드는 것이 아닌 만큼 고객 관점에서 기존 수수료 체계가 불합리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2억원 주문 시 약 99만원이던 수수료를 절반 수준인 51만원으로 깎았다.

이원락 한화투자증권 상품전략팀장은 “단기적인 흐름이나 이슈에 따른 투자보다는 원칙에 맞는 올바르고 안정적인 투자 문화가 정착되도록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