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 20년간 동독과 교류 협력을 확대했습니다. 장벽은 있었지만 통과할 수 있는 장벽의 ‘구멍’들이 점점 많아진 거죠. 박근혜 대통령이 3월 독일을 방문했을 때 드레스덴 연설에서 인적 교류를 강조했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오른쪽)가 베어린의 독일인 주방장 보게 모리츠가 건넨 맥주를 들고 환히 웃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오른쪽)가 베어린의 독일인 주방장 보게 모리츠가 건넨 맥주를 들고 환히 웃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오페라 ‘천생연분’을 아세요? 2006년 3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한국 오페라입니다.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죠. 활력이 넘치고 화려하게 장식한 무대를 보면서 감탄했는데 지난 5월 한국에서 다시 보게 돼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서울 수송동에 있는 독일 음식점 베어린에서 지난달 30일 만난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는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한국 공연에 반했다며 가져온 팸플릿들을 꺼내 보였다. 2012년 부임한 그는 전통적인 이야기에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한 공연을 즐겨 본다고 했다. 마파엘 대사는 “춘향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발레공연 ‘춘향’, 월드뮤직그룹 ‘반(VANN)’의 공연이 인상적이었다”며 “대사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팀을 초청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공연을 보면서 아쉬운 점이 없었느냐는 질문엔 “그보다는 보고 싶은 한국 공연이 있는데도 대사라서 내한한 독일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야 했을 때 아쉬웠다”며 웃었다.

독일 통일, 외교관인데도 예상하지 못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맥주부터 주문했다. 대표적 독일 맥주 중 하나인 에딩거였다. 입안에서 기분 좋게 터지는 탄산은 상큼했고, 거품은 부드러웠다. 달콤한 끝 맛의 맥주였다. 마파엘 대사는 한국 사람들이 독일 맥주를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기회가 되면 독일 와인도 마셔보라고 권했다. “독일 남부 지역에서는 와인이 보편적인 음료입니다. 포도를 재배해 직접 생산한 와인을 끼니 때마다 곁들이죠. 대부분 소규모로 생산돼 한국에선 접하기 쉽지 않지만 맛과 향은 매우 좋습니다.”

맥주 한 잔을 비워가는 사이 집시 슈니첼이라는 돈가스 비슷한 음식이 나왔다. 돈가스와의 차이는 기름에 튀기지 않고 돼지고기에 계란을 얇게 씌운 뒤 팬에 구워냈다는 점. 집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헝가리의 집시들이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파엘 대사는 “슈니첼은 독일과 헝가리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도 즐겨 먹는 음식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화제가 독일 통일로 옮겨갔다. 외교관인 만큼 ‘정보’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해 독일 통일의 뒷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독일에서 통일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마파엘 대사는 “1989년 11월9일 저녁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는데, 폴란드를 방문 중이던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그날 오후에 ‘내 생애 통일은 안 될 것 같다’는 발언을 했을 정도”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마파엘 대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미국 뉴욕의 아파트에서 TV로 봤다고 했다. “유엔에 파견근무를 나가 있을 때였습니다. 1년에 3개월을 뉴욕 유엔본부에서 일했는데 그때 장벽이 무너졌어요. 통일을 실감한 것은 유엔본부에서 자리가 하나 없어졌을 때입니다. 원래 유엔에 동독과 서독 자리가 나란히 붙어 있었어요. 근데 통일이 되면서 바로 의자 하나가 없어졌죠.”

마파엘 대사는 남북 통일에 대한 한국 젊은이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을 이해한다며, 동독과 지리적으로 먼 프랑스와의 국경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동독에 친인척이 없었던 자신도 동·서독 통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분단 시절 독일 젊은이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생각은 ‘모두가 자유롭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를 통일된 독일에서 누리느냐, 분단된 상황에서 누리느냐는 큰 관심이 아니었어요. 한국 젊은이들이 통일에 관심이 별로 없거나 설령 거부감이 있더라도 ‘한반도의 모든 사람이 자유와 경제적 부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통일을 위해서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생각을 갖고 교류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도 강조했다. “서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 20년간 동독과 교류 협력을 확대했습니다. 장벽은 있었지만 통과할 수 있는 장벽의 ‘구멍’들이 점점 많아진 거죠. 박근혜 대통령이 3월 독일을 방문했을 때 드레스덴 연설에서 인적 교류를 강조했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김치와 매운탕

마파엘 대사는 독일식 수제 햄인 카슬러가 나오자 함께 나온 사우어크라우트를 곁들여 먹으라고 권했다. 카슬러는 돼지고기를 절여 훈제해 삶은 것이다. 이날 나온 카슬러는 빵가루를 입혀 오븐에 한 번 더 구운 것으로 부드럽고 고소했다. 사우어크라우트는 양배추로 만든 샐러드로 한국의 김치처럼 독일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한국 사람들이 김장하듯이 독일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양배추를 사다가 식초를 넣어 발효해 겨우내 먹습니다. 요즘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옛날처럼 많은 사람이 직접 담가 먹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집에서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조금씩 느는 추세입니다.”

그는 한국 김치도 즐겨 먹는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깍두기와 오이소박이. 아삭한 식감과 채소 고유의 향이 배어 나와 좋다고 했다. 배추김치도 좋아하지만 부인과 같이 있을 때만 먹는다고 했다. 이유는 마늘 때문. 그는 “둘 중에 한 명만 먹으면 상대가 강한 마늘 향을 느끼기 때문에 꼭 같이 먹는다”고 말했다. 마파엘 대사는 “김치뿐 아니라 궁중음식, 사찰음식, 갈비, 불고기 등 다양한 한식을 다 좋아한다”며 “얼마 전엔 매운탕을 처음 먹어봤는데 시원한 맛에 반했다”고 덧붙였다.

요리도 즐겨 하는 편이라며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생 때 돈을 아끼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집을 빌려 모여 사는 일종의 셰어하우스에서 지냈죠. 그 집에 들어가는 조건이 12인분의 4가지 코스 요리를 할 수 있는 거였어요. 한 달에 한두 번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12인분 이상의 음식을 해야 했는데 요리솜씨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됐어요. 한국 음식도 기회가 되면 꼭 배워보고 싶습니다.”

한국은 꿈의 부임지…떠나기 아쉬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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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활에 어려움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독일대사에게 한국은 꿈의 부임지”라고 했다.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국가일 뿐 아니라 깨끗하고 한국인들이 친절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발령이 나기 몇 달 전 남미로 예정됐던 부임지가 갑자기 한국으로 바뀐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내에게 전화해 서울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바로 서울이 더 좋다고 답하더군요. 와서도 만족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친절한데 독일인에겐 더 친절한 것 같아요. 떠날 때가 되면 많이 아쉬울 것 같습니다.”

독일식 수제 파스타인 치즈 슈페츨레를 권하는 마파엘 대사에게 한국에 있는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을 묻자 불쑥 학창 시절의 꿈 얘기를 꺼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졸업 후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셨어요. 네팔 대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1974년, 히피가 많은 시절이었죠. 자연을 동경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터키, 아프가니스탄, 인도 등으로 1년 넘게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도 했어요. 저도 그런 생활을 꿈꾸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 꿈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 제일 하고 싶은 것이 ‘템플스테이(산사 체험)’. 그는 “요가와 명상, 물구나무 서기 등을 즐긴다”며 “한국의 불교와 수련법 등을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 택시 회사 운영·검사…다채로운 '이력'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는 외교관이 되기 전까지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대학 시절에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들과 택시회사를 운영했다. 마파엘 대사는 “매년 수익금으로 새 택시 한 대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실적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졸업 후엔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검사로 일했다. 마파엘 대사는 “검사 시절 경제범죄를 전담했다”며 “직접 회사를 운영해봤기 때문에 어떤 과정으로 불법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베를린 장벽에 '구멍' 많아지다 보니 저절로 통일"
롤프 마파엘 대사의 단골집 '베어린' 학세·집시 슈니첼…獨 전통요리를 한국식으로 재해

서울 수송동 서머셋팰리스 1층에 있는 베어린은 독일인 요리사가 전통 독일 요리 방식을 기본으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해석한 음식들을 선보인다. 베어린은 독일어로 ‘곰’이란 뜻. 수도 베를린을 상징한다.

2005년 6월 문을 연 이곳의 메뉴 중에는 한국의 족발과 비슷한 학세가 가장 유명하다. 학세는 4~5일 숙성한 돼지 뒷다리 정강이 부분을 1시간반 이상 삶은 뒤 오븐에 구워 만든다. 먹기 좋은 크기로 얇게 썰어 구운 감자, 사우어크라우트(양배추 샐러드)와 함께 낸다. 세 명이 먹기에 적당한 양이다. 가격은 9만6000원. 돈가스와 비슷한 집시 슈니첼(3만9500원)도 인기 메뉴다. 파프리카 소스를 곁들여 맛이 매콤하고 담백하다는 평가다. 프랑크푸르트식, 뮌헨식, 남독일식 등 다양한 종류의 독일식 소시지도 맛볼 수 있다. 가격은 2만5000~2만7000원.

베어린은 ‘맛있는 독일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비트브루거, 크롬바커, 퀘스트리처, 크롬바커 슈바르츠 비어, 에딩거 바이젠, 에딩거 둔켈 등 독일의 유명 생맥주들을 판매한다. 가격은 1만~1만4500원.
[한경과 맛있는 만남] "베를린 장벽에 '구멍' 많아지다 보니 저절로 통일"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