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
암 투병 과정의 철학적 깨달음…물질 중심의 사회, 철학은 더 중요
최근 책 ‘파테이 마토스(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다)’를 펴낸 백승영 한국니체학회 부회장(사진)의 말이다. ‘암과 함께 한 어느 철학자의 치유 일기’라는 부제 그대로 2010년 12월 갑자기 찾아온 암과 싸워 온 과정을 철학적 단상과 함께 풀어낸 책이다. 강연차 서울 서대문이진아도서관에 온 백 부회장을 지난 2일 만났다. 그는 아직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씩씩했다. 이날 강연 주제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명언 ‘신은 죽었다’.
“두 가지 뜻이 있어요. 먼저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적 세계를 논하게 만들어 아름다운 현실세계를 보지 못하게 막았다. 초월적 세계는 사실 없고 그래서 신은 죽었다는 겁니다. 또 원래 기독교의 목적인 ‘사랑의 실천’을 외면하고 비대해진 교회가 ‘신을 죽였다’란 비판적 의미도 있어요.”
그는 발병 이듬해 초 수술한 뒤 지독한 항암 치료를 받았다. 백 부회장은 책에 투병 과정을 생생히 기록했다. ‘방사선, 허셉틴, 타목프렉스, 졸라덱스 네 가지 치료의 합동 공격에 난 완전히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몸 어느 구석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곳이 없었다. 수술이 차라리 가장 쉬웠다. 죽는 게 낫겠다….’ 그러나 절망적 순간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 ‘죽음으로의 선구’를 이끌어낸다. 죽음을 직시해야만 비로소 삶의 소중함이 보이고 그 전엔 결코 모른다는 것이다.
또 투병 과정 중 남편(한광석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낀 것을 계기로 니체의 또 다른 말 ‘초인’을 설명한다. 천박한 이기심에서 벗어나 관계 속에서 자기를 극복하며 진정 행복해진 인간이 초인이다. 또 ‘건강하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절절히 느낀 감정은 니체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는 구절로 이어진다.
백 부회장은 “니체의 사상은 파편적으로 또는 멋 내기용으로만 쓰였을 뿐 국내에서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다”고 했다.
2005년 니체의 인식철학 연구서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등 다수 저서와 논문을 낸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니체 전문가’다. 미셸 푸코, 장 보드리야르, 자크 데리다 등 니체로부터 촉발된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들에 대한 연구서도 펴냈다. 백 부회장은 서강대 철학과 학·석사를 마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대에서 니체 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1998년 귀국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학 교수직을 얻지 못했다. “잘 아시다시피 철학은 배고픈 학문이에요. 니체는 특히 반(反)이성으로 인간 한계를 극복하려는 비주류 입장이라 칸트 등 합리주의 전공자에 비해 밀리고요. 하지만 철학자가 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백 부회장은 향후 법, 정치, 국가, 정의 등을 다룬 니체 실천철학 연구서를 펴낼 예정이다. 그는 “끝없이 물질 중심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정신세계를 밝히는 철학이 중요하다”며 “철학자들이 좁은 연구실에서만 머물지 말고 사회적으로 각성해 여러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l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