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리포트] '먹잇감' 아르헨 목줄 쥐고…군침 흘리는 벌처 펀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4800만弗에 산 채권 들고 "13억弗 다 내놔라"
아르헨티나 '진퇴양난'
지급 안하면 30일 최종 디폴트…주자니 원금탕감 채권자 '눈치'
합법적 투자 vs 국제금융 교란
美법원 "정당한 권리행사 보장"…IMF "위험한 사례 남겼다" 비판
아르헨티나 '진퇴양난'
지급 안하면 30일 최종 디폴트…주자니 원금탕감 채권자 '눈치'
합법적 투자 vs 국제금융 교란
美법원 "정당한 권리행사 보장"…IMF "위험한 사례 남겼다" 비판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이 브라질 월드컵 8강행을 확정지은 다음날인 지난 2일. 아르헨티나의 대표 일간지 ‘엘 아르헨티노’의 1면을 장식한 인물은 축구영웅 리오넬 메시가 아니었다.
1면 헤드라인은 백발의 미국 뉴욕 연방법원 판사인 토머스 그리사가 차지했다. 아르헨티나는 그리사 판사가 내린 판결로 지난 6월30일 자정에 만기가 돌아온 국채이자를 지급하지 못해 ‘선택적 디폴트(채무 중 일부를 갚지 못한 상태)’에 빠졌다. 신문은 그를 투기자본인 벌처 펀드의 손을 들어주며 2001년 이후 13년 만에 아르헨티나를 또다시 국가부도 위기로 몰아넣은 악인으로 묘사했다.
아르헨티나 금융시장은 그의 판결로 이미 ‘지옥’을 경험했다. 아르헨티나 주가와 국채 가격은 폭락하고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스프레드는 판결 당일에만 15% 급등했다.
이미 ‘1차 부도’가 난 상황에서 남아있는 협상시한은 이달 30일까지다. 벌처 펀드가 청구한 13억달러를 전액 지급하지 않는 한 대외채무를 갚을 방법이 없어진 아르헨티나가 최종 부도를 피할 수 있을까.
○4800만달러에 사서 13억달러 요구
미국계 투자회사 엘리엇 어소시에이츠 산하의 NML 등 벌처 펀드들은 2008년 후반부터 조용히 아르헨티나 부실채권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벌처 펀드란 부도 처리된 부실채권(NPL·non-performing loan)에 투자해 고수익을 올리는 투기 성향이 강한 사모펀드다.
이들이 아르헨티나 채권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2001년 950억달러에 달하는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디폴트를 선언한 아르헨티나의 대외채무 협상이 끝나가면서 대박을 올릴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
아르헨티나 정부는 부도 후 외국 채권 기관들과 마라톤 협상을 벌여 채권 원리금의 최대 75%를 탕감받기로 했다. 기존 채권은 71~75% 할인된 가격에 새 채권으로 교환됐고, 2010년엔 전체 부도 채권의 93%가 재조정됐다.
문제는 나머지 7%였다. 이 중 상당수를 벌처 펀드가 대폭 할인된 가격에 사들인 뒤였다. 점차 디폴트의 충격에서 벗어나 회복 중인 아르헨티나 경제를 볼모로 한 벌처 펀드의 ‘도박’은 2012년 2월 미국 법원에 원리금 반환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들 벌처 펀드가 채권 매입에 쓴 돈은 4800만달러. 하지만 액면가를 기준으로 한 청구금액은 그보다 30배 가까이 많은 13억3000만달러에 달했다.
초반 아르헨티나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소송은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정당한 권리행사를 보장해야 한다는 법리적 판단이 벌처 펀드의 투기적 행태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더니 급기야 2012년 11월 뉴욕 연방지방법원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13억3000만달러를 전액 상환하는 것은 물론 이 돈을 전부 갚기 전까진 당초 30% 수준으로 조정된 다른 채권자에 대한 채무도 갚지 못하게 판결했다. 아르헨티나는 미 연방고등법원을 거쳐 미 연방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지난달 이마저 기각되면서 또 한번 디폴트 위기에 몰렸다.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벌처 펀드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부실채권은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수익률은 높았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크본드(고위험·고수익채권)의 창시자’ 마이클 밀켄의 등장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부도위험이 높은 채권을 묶어 유동화하면 하나의 채권이 부도가 나더라도 다른 채권에서 얻은 수익으로 손실을 메우면서 전체 자산은 덜 위험해진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면서 벌처 펀드가 생겨났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을 덮친 불황은 벌처 펀드들엔 기회였다. 당시 미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저축대부조합이 부실화되고, 해결사로 나선 정리신탁공사(RTC)가 1989~1995년 747개의 부실 저축대부조합을 정리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부실채권이 시장에 쏟아졌다. 당시의 대표적인 투자자가 지금도 ‘행동주의 투자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칼 아이칸이다. 그는 1989년 말부터 액면가의 35%에 선순위 회사채 1억7000만달러어치를 사들여 90%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경제가 되살아나고 부실기업이 급감하면서 벌처 펀드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경제위기에 봉착한 국가의 국채를 싸게 사들인 뒤 해당 정부를 압박해 원리금을 받아내기 시작한 것. 실패하면 소송을 통해 뜯어갔다.
○국제금융시장 교란 우려도
국제 금융시장의 관심은 과연 ‘남미 제2의 경제대국’까지 벌처 펀드의 먹잇감이 될 것이냐에 집중되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미국의 강탈 행위에 굴복할 수 없다”며 “채무 재조정에 합의한 채권단을 위해서라도 벌처 펀드에 채무를 전액 상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국제기구들은 벌처 펀드의 ‘비즈니스 모델’이 국제 금융질서를 교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파산이 가능한 기업과 달리 국가에 완전한 의미의 파산은 없다”며 “이런 맹점을 이용한 일부 금융권의 투자는 보호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아르헨티나의 사례가 다른 국가의 채무조정에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고 우려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벌처 펀드가 국가 채무조정을 어렵게 하는 ‘인질효과’를 낳을 수 있다”며 “자칫 채무조정에 응한 대다수 협약채권자의 집단행동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벌처 펀드
vulture fund. 벌처 펀드란 사체를 먹이로 삼는 독수리를 의미하는 ‘벌처’에서 이름을 딴 펀드로 부실기업이나 부실채권 등에 투자해 고수익을 노리는 펀드를 말한다. 부실채권에 투자하는 경우 액면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인수하기 때문에 채권을 발행한 기업이나 국가가 회생할 경우 막대한 수익을 거둔다. 일반적인 채무 조정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소송 등의 방법으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때문에 국제 금융질서를 교란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1면 헤드라인은 백발의 미국 뉴욕 연방법원 판사인 토머스 그리사가 차지했다. 아르헨티나는 그리사 판사가 내린 판결로 지난 6월30일 자정에 만기가 돌아온 국채이자를 지급하지 못해 ‘선택적 디폴트(채무 중 일부를 갚지 못한 상태)’에 빠졌다. 신문은 그를 투기자본인 벌처 펀드의 손을 들어주며 2001년 이후 13년 만에 아르헨티나를 또다시 국가부도 위기로 몰아넣은 악인으로 묘사했다.
아르헨티나 금융시장은 그의 판결로 이미 ‘지옥’을 경험했다. 아르헨티나 주가와 국채 가격은 폭락하고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스프레드는 판결 당일에만 15% 급등했다.
이미 ‘1차 부도’가 난 상황에서 남아있는 협상시한은 이달 30일까지다. 벌처 펀드가 청구한 13억달러를 전액 지급하지 않는 한 대외채무를 갚을 방법이 없어진 아르헨티나가 최종 부도를 피할 수 있을까.
○4800만달러에 사서 13억달러 요구
미국계 투자회사 엘리엇 어소시에이츠 산하의 NML 등 벌처 펀드들은 2008년 후반부터 조용히 아르헨티나 부실채권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벌처 펀드란 부도 처리된 부실채권(NPL·non-performing loan)에 투자해 고수익을 올리는 투기 성향이 강한 사모펀드다.
이들이 아르헨티나 채권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2001년 950억달러에 달하는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디폴트를 선언한 아르헨티나의 대외채무 협상이 끝나가면서 대박을 올릴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
아르헨티나 정부는 부도 후 외국 채권 기관들과 마라톤 협상을 벌여 채권 원리금의 최대 75%를 탕감받기로 했다. 기존 채권은 71~75% 할인된 가격에 새 채권으로 교환됐고, 2010년엔 전체 부도 채권의 93%가 재조정됐다.
문제는 나머지 7%였다. 이 중 상당수를 벌처 펀드가 대폭 할인된 가격에 사들인 뒤였다. 점차 디폴트의 충격에서 벗어나 회복 중인 아르헨티나 경제를 볼모로 한 벌처 펀드의 ‘도박’은 2012년 2월 미국 법원에 원리금 반환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들 벌처 펀드가 채권 매입에 쓴 돈은 4800만달러. 하지만 액면가를 기준으로 한 청구금액은 그보다 30배 가까이 많은 13억3000만달러에 달했다.
초반 아르헨티나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소송은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정당한 권리행사를 보장해야 한다는 법리적 판단이 벌처 펀드의 투기적 행태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더니 급기야 2012년 11월 뉴욕 연방지방법원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13억3000만달러를 전액 상환하는 것은 물론 이 돈을 전부 갚기 전까진 당초 30% 수준으로 조정된 다른 채권자에 대한 채무도 갚지 못하게 판결했다. 아르헨티나는 미 연방고등법원을 거쳐 미 연방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지난달 이마저 기각되면서 또 한번 디폴트 위기에 몰렸다.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벌처 펀드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부실채권은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수익률은 높았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크본드(고위험·고수익채권)의 창시자’ 마이클 밀켄의 등장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부도위험이 높은 채권을 묶어 유동화하면 하나의 채권이 부도가 나더라도 다른 채권에서 얻은 수익으로 손실을 메우면서 전체 자산은 덜 위험해진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면서 벌처 펀드가 생겨났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을 덮친 불황은 벌처 펀드들엔 기회였다. 당시 미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저축대부조합이 부실화되고, 해결사로 나선 정리신탁공사(RTC)가 1989~1995년 747개의 부실 저축대부조합을 정리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부실채권이 시장에 쏟아졌다. 당시의 대표적인 투자자가 지금도 ‘행동주의 투자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칼 아이칸이다. 그는 1989년 말부터 액면가의 35%에 선순위 회사채 1억7000만달러어치를 사들여 90%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경제가 되살아나고 부실기업이 급감하면서 벌처 펀드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경제위기에 봉착한 국가의 국채를 싸게 사들인 뒤 해당 정부를 압박해 원리금을 받아내기 시작한 것. 실패하면 소송을 통해 뜯어갔다.
○국제금융시장 교란 우려도
국제 금융시장의 관심은 과연 ‘남미 제2의 경제대국’까지 벌처 펀드의 먹잇감이 될 것이냐에 집중되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미국의 강탈 행위에 굴복할 수 없다”며 “채무 재조정에 합의한 채권단을 위해서라도 벌처 펀드에 채무를 전액 상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국제기구들은 벌처 펀드의 ‘비즈니스 모델’이 국제 금융질서를 교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파산이 가능한 기업과 달리 국가에 완전한 의미의 파산은 없다”며 “이런 맹점을 이용한 일부 금융권의 투자는 보호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아르헨티나의 사례가 다른 국가의 채무조정에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고 우려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벌처 펀드가 국가 채무조정을 어렵게 하는 ‘인질효과’를 낳을 수 있다”며 “자칫 채무조정에 응한 대다수 협약채권자의 집단행동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 벌처 펀드
vulture fund. 벌처 펀드란 사체를 먹이로 삼는 독수리를 의미하는 ‘벌처’에서 이름을 딴 펀드로 부실기업이나 부실채권 등에 투자해 고수익을 노리는 펀드를 말한다. 부실채권에 투자하는 경우 액면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인수하기 때문에 채권을 발행한 기업이나 국가가 회생할 경우 막대한 수익을 거둔다. 일반적인 채무 조정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소송 등의 방법으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때문에 국제 금융질서를 교란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