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나만의 온천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올 무렵, 눈발이 휘날리는 홋카이도 다이세츠(大雪)산의 야외 온천에 앉아 있었다. 혼자 조용히 생각이나 할까 해서 갔는데 옆에 서너 명의 한국 사람이 사업 등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는 통에 마음만 산란해졌다. 주로 부동산 사업 얘기였다. 그때 직급이 가장 높은 듯한 사람이 한 말이 둔기로 머리를 내리치듯 확 다가왔다. “인생을 살다보면 칼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하지. 그럴 때 이런 온천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인생에 휘몰아치는 칼바람은 예상할 수도 피하기도 힘들다. 다들 피해보려 노력하고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고 여기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질 않다. 이런 세상에서는 칼바람을 피하려 하기보다 나만의 온천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온천은 나를 좌절과 상처에서 회복시켜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와이 카우아이섬의 연구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에미 워너 교수는 1955년에 태어난 신생아 중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201명을 추려 성장과정을 추적 조사했다. 예상대로 불우한 환경의 사람은 성장 과정도 순탄하질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통념과는 달리 이 중 3분의 1이 문제아가 되지 않고 밝은 성격으로 자라났다는 점이다. 이들을 살펴보니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주던 존재가 집안에나 주변에 있었다. 어릴 적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할머니와 같은 사랑의 온천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현재보다 미래를 더 할인, 즉 낮은 가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노후의 칼바람을 잘 모른다. 노후에는 직장을 떠나는 등 그동안 익숙했던 많은 것들과 결별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만의 온천을 하나씩 가져야 하는 이유다. 이미 있는 사람은 한두 개 정도 더 마련해야 한다. 없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만들어도 늦지 않다. 특히 감정적으로 취약하고 은퇴 전후 무방비로 노출된 남자들은 더욱 필요하다. 한 방송사 팀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고독사(死)가 1만1000여건에 달했고 이 중 남자가 73%였다.

그 온천이 무엇일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친구, 배우자, 가족, 돈, 종교, 수양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온천을 잘 개발하고 또 관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나의 온천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자.

김경록 <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grkim@miraeasse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