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공대 출신 인재들이 한국의 먹거리를 창출하고 산업화를 이룬 것처럼 이제는 의사들이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정보기술(IT)과 융·복합하거나 나노 의학, 유전체 의학 등에서 새로운 국민적 먹거리를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소서(小暑)인 게 무색하지 않을 만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7일 저녁.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은 단골집인 경기 성남시 서현동 ‘평양면옥’에서 냉면 한 그릇을 하자고 했다. 기온은 34도에 육박해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 시원한 냉면 육수 한 사발이 마침 간절한 참이었다.

평양면옥에 들어선 이 원장은 180㎝를 넘는 키에 군살이 없어 보였다. 비결은 운동과 함께 하루 한 끼에 500㎉ 정도만 먹는 것. 보통 성인 하루 권장 열량은 2300~2500㎉니 한 끼 500㎉씩 세 끼를 먹어도 평균 권장량의 70% 정도다. 500㎉ 식단은 병원 내 영양사가 전문적으로 정해 매일 도시락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이 원장은 “나이가 60대로 접어들면서 몸무게를 줄이고 체력을 키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며 “한 끼 500㎉를 먹은 지는 두세 달 정도 됐다”고 설명했다. 그의 지금 몸무게는 80㎏대다. 이 원장은 “일부 직원과 함께 다이어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효과가 좋아 전 직원에게 적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냉면은 위로의 음식”

자리에 앉자마자 메밀면을 삶은 따뜻한 물이 올라 왔다. 고기 육수가 나오는 일반 냉면집과는 달랐다. 숭늉과 비슷한 구수한 맛이 났다. 싱겁다 할 정도로 조미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원장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냉면에 대한 추억을 풀어놨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이북식 냉면집을 자주 찾았다. 이 원장의 부친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서다. 부친은 1947년 고향인 평안도에서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내려왔다. 당시 북쪽에서는 조선노동당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설립하면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등 사회주의 정권 수립작업이 한창이었다.

평양에서 법학을 전공한 부친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길 거부했다. 머지않아 당에 가입한 친한 친구로부터 숙청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쪽에 아무 연고가 없던 부친은 대학 은사가 인천에서 판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인천으로 갔다. 이후 이 원장의 부친은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했다.

이 원장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평양냉면을 드시면서 위안을 삼으셨다”며 “냉면을 통해 어렴풋이 아버지의 고향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원래 꿈인 법관이 되지 못한 부친은 못다 이룬 꿈을 이 원장이 이뤄주길 바랐다. 이 원장이 다닌 인천 제물포고에서 서울대 법대에 가려면 전교 10등 안에 들어야 했다. 하지만 고교 2학년 때 이 원장의 등수는 전교 28등이었다고 한다. 법대를 가기에는 모자란 성적이었다. 이 원장은 이과를 선택했다. 그는 3학년에 올라가자마자 공부에 매진했다.

“3학년 1학기가 끝났을 때쯤 전교 5등을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서울대 어느 과를 가도 붙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문과로 바꿔 법대에 갈까도 생각했는데 막상 이과 공부한 게 아까웠습니다. 이과에 남겠다고 했죠.”

그렇다고 의대에 진학하자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 원장이 고교에 다니던 1960~1970년대에는 의예과가 아닌 물리학과가 이공계에서 인기가 최고였다.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지금보다는 클 때였다. 이 원장이 기억하는 전교 1등 친구도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반면 의대는 전교 30등 안에 들면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원장이 의대 진학을 결정한 것은 고교 은사의 조언 때문이었다. “원래 법대에 가고 싶어한 것을 알았던 은사께서 의대에 진학하라고 하셨습니다. 법관은 남을 벌주는 일을 하지만 의사는 남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요 .”

◆“이비인후과는 편한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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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장이 이 식당에 오면 꼭 먹는다는 돼지고기 수육(제육)이 올라왔다. 지방이 적당한 삼겹살이 두툼하게 썰려 나왔다. 새우젓에 찍어 입에 넣자 짭조름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서울대 의대에 72학번으로 입학한 이 원장은 고교 3학년 때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고 했다. 이 원장은 “뛰어난 학생이 많아 굉장히 겁을 먹고 공부했다”며 “인천에서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학교 근처에서 하숙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본과 1학년 1학기 때 전 과목 A플러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올 A플러스를 받으니까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숙도 그만두고 놀아버렸죠. 그랬더니 2학기 때 학점이 2.7점(4.3점 만점)이 나왔어요. 재시험도 보고 난리도 아니었죠. 허허.” 이 원장은 안되겠다 싶어 마음 맞는 친구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시험을 준비했다. 당시 함께 스터디그룹을 꾸린 친구 중 한 명이 이원표 전 대한개원내과의사회장이다.

이 원장은 처음에는 산부인과 의사를 꿈꿨다. 재미도 있었고 산부인과 성적도 좋았다. 하지만 친한 친구가 산부인과를 원한다고 해서 친구와 경쟁하지 않으려고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학생 때 병원 실습을 하러 가보니 이비인후과 의사들은 오후 4시만 되면 테니스 치러 가더라고요. 상대적으로 편한가보다 싶어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니 상황이 아주 바뀌었죠. 호랑이로 소문난 교수님이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신 거예요. 맹렬하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허허.”

◆CEO 의사가 되다

이 원장이 옛 이야기를 한창 하는 사이 식당 직원이 식사 주문을 권했다. 이 원장은 “당연히 물냉면이지~”라고 잘라 말했다. 그를 따라 비빔냉면이 아닌 물냉면을 시켰다.

물냉면을 기다리면서 의사이자 병원의 최고경영자(CEO)로서 애환을 듣고 싶었다. 이 원장은 2009년 보라매병원 원장을 맡은 뒤 지난해 분당서울대병원장에 취임했다. 병원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병원 내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책임은 병원장에게 있다.

“1주일에 수술은 한 번 정도, 외래 환자는 1시간가량 봅니다. 원장 임기가 끝나면 교수로 돌아가는데 진료를 손에서 놓아버리면 복귀 후 적응이 힘들기 때문이죠. 경영에만 전념하기에 어려운 환경인 것은 사실입니다. 4000명 직원의 앞날을 24시간 생각해도 모자란데 어깨가 무겁죠.”

이 원장은 그러나 취임 후 뛰어난 경영 능력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방위부 소속 6개 병원에 700억원 규모의 병원 정보 시스템을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는 등 성과를 냈다. 병원 정보 시스템은 2004년 이 원장이 대표를 맡은 서울대병원 자회사 이지케어텍에서 개발한 것이다. 차트·전표·필름·처방전을 전산화하는 시스템이다.

이 원장은 “이 시스템을 활용하면 병원에서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임상 데이터를 바로 뽑을 수 있다”며 “병원 운영의 효율성이 높아질 뿐 아니라 과잉 처방의 가능성이 줄어 환자에게도 좋다”고 설명했다.

◆“의사들, 국민 요구에 부응할 때”

이 원장이 ‘뒤돌아서면 생각날 것’이라고 단언한 물냉면이 상에 올랐다. 맑은 육수를 한 수저 떴다. 소고기로 우려낸 육수답지 않게 담백했다. 이 원장이 말한 대로 밍밍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고춧가루를 조금 쳐서 먹어보라고 했다. 고춧가루를 풀자 육수의 풍미가 더 느껴졌다.

음식을 집어먹는 이 원장은 양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른손에 찬 것은 시계가 아니라 건강관리 기기인 ‘헬스온 샤인’이었다. 그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헬스커넥트가 만든 것이다.

헬스커넥트는 2012년 설립된 서울대병원 자회사다. 모바일 헬스케어 서비스를 개발하는 업체다. 최근 정부가 의료법인 자회사 설립을 허용하면서 성공 사례로 헬스커넥트를 꼽았다. 하지만 뒤이어 의료 민영화 논란이 일었다. 헬스커넥트는 의료 민영화의 대표 사례로 지목됐다.

그는 “금융 시스템이 전산화가 이뤄진 뒤 모바일 서비스가 활성화됐듯이 헬스케어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국민 편익 향상에 의료계도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성남시 정자동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옥을 매입해 ‘메디컬 바이오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르면 올해 안에 LH와 협상을 매듭지을 계획이다.

이 원장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좋은 인재들이 의대에 많이 진학했다”며 “1970년대 공대 출신 인재들이 한국의 먹거리를 창출하고 산업화를 이룬 것처럼 이제는 의사들이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미 한국 병원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며 “정보기술(IT)과 융·복합하거나 나노 의학, 유전체 의학 등에서 새로운 국민적 먹거리를 만드는 데 분당서울대병원이 기여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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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케어 찬 CEO…自社 제품 '홍보맨'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이 착용하고 다니는 ‘헬스온 샤인’(사진). 걷는 양을 측정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응용프로그램)에 정보를 보내는 기기다.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서울대병원 자회사 헬스커넥트의 건강관리 앱 ‘헬스온’을 통해 걷는 양, 음식 섭취량, 운동량 등을 관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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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원장의 단골집 '평양면옥' 돌아서면 생각나는 밍밍한 육수 맛…제육 곁들이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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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시 서현동에 있는 ‘평양면옥’은 사장 서금순 씨가 시어머니에게 배운 비법을 고수하고 있는 식당이다. 평양식 냉면답게 육수 맛은 심심한 것이 특징이다. 육수를 만들 때 양지 등 소고기로 우려낸 국물을 쓴다. 쫄깃하고 탱탱하지만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면은 메밀로 만든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온면으로 즐길 수 있다. 가격은 1만1000원이다. 5000원을 추가하면 곱빼기로 나온다.

돼지고기 수육인 ‘제육’과 소고기 수육인 ‘편육’도 맛볼 수 있다. 각각 2만4000원, 2만5000원이다. 국내산 돼지고기로 만드는 만두(1만1000원)도 있다.

보다 특별한 평양 음식을 먹고 싶다면 ‘어복쟁반’을 추천한다. 어복쟁반은 소고기 편육과 여러 가지 채소가 따뜻한 국물과 함께 나오는 평양 지방 향토음식이다. 소(小)자는 5만원, 대(大)자는 8만원이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203의1 (031)701-7752

조미현/이준혁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