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은 대동강 유역 아닌 허베이 동남쪽"
역사학계에서 이른바 주류인 강단사학과 비주류인 민족사학의 견해가 가장 크게 갈라지는 게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사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어디였느냐가 논란의 대상인데, 그 핵심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해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다.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따라 고조선과 고구려의 발상지와 위치 등 한국 고대사의 무대 범위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역사학자인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58·사진)이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 허베이(河北)성 동쪽에서 시작해 서남쪽으로 발해를 끼고 있었다”는 주장을 내놨다. 최근 펴낸 책《사고전서 자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바른역사 펴냄)을 통해서다. 지금까지 나온 주장 가운데 가장 대륙 중심을 향해 서쪽으로 나아간 것이다.

“낙랑군은 허베이성 동부 친황다오시 루룽현, 산하이관 일대에서 서쪽으로 탕산·톈진시를 지나 바오딩시 쑤이청진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를 끼고 동서에서 서로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 심 원장의 설명. 쑤이청진은 베이징 바로 남쪽이다.

사실이라면 교과서를 바꿔야 할 사안이다. 지금까지 낙랑군에 대한 학계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한반도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단의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설과 중국 요동 또는 요서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다. 대동강 유역설은 이병도·이기백·노태돈 등 강단사학자들, 요동설은 단재 신채호, 요서설은 정인보, 리지린, 윤내현 등의 주장이다. 현재 대동강 낙랑설이 학계 정설로 인정돼 국사 교과서에 기술돼 있다.

심 원장의 주장이 주목받는 것은 18세기 청나라 건륭제가 당대(當代)까지의 중국 사료를 집대성한 ‘사고전서’에 나오는 자료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반고가 편찬한 한서(漢書) ‘가손지전’에는 “(한 무제가) 동쪽으로는 갈석(碣石)을 지나 현도·낙랑으로써 군(郡)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갈석’을 현재 친황다오시 창리현에 있는 갈석산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심 원장은 “창리현의 갈석산은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한 무제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다”며 “원래의 갈석산은 허베이성 남쪽 오늘의 호타하 유역 북쪽에 있었고 이것이 지금의 백석산”이라고 주장한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역시 산해관 장성이 아니라 쑤이청진에 문화재로 보존돼 있는 연(燕)장성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심 원장은 ‘전한서’ ‘후한서’ ‘수서’ ‘통전’ 등 20종의 사서에 기록된 낙랑 관련 기록을 발췌해 원문과 번역문, 해설, 출전에 관한 설명을 이 책에 실었다. 이를 통해 요하·요동·요서·고죽국·갈석산·수성현 등의 위치와 역사적 변천 과정 등을 꼼꼼히 짚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낙랑 관련 기록보다 연대가 훨씬 앞서는 여러 사료를 중국의 정사(正史) 자료에서 찾아냈다.

그는 “사고전서의 여러 기록은 지난날 고조선과 고구려의 활동 무대가 대륙의 동쪽 변방이 아니라 중원의 심장부였음을 말해준다”며 “대동강 낙랑설을 중심으로 서술된 우리 국사 교과서는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