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왕국을 일궜던 장 폴 게티(왼쪽)와 그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미국 샌타모니카의 게티센터 전경.
석유왕국을 일궜던 장 폴 게티(왼쪽)와 그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미국 샌타모니카의 게티센터 전경.
세계 최고의 갑부 장 폴 게티(1892~1976)는 자린고비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록펠러가를 능가하는 부를 자랑하던 그였지만 자선활동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보다 못한 록펠러가 사람들이 게티를 찾아가 부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라고 넌지시 충고할 정도였다.

1966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부자로 기록된 그는 개인으로선 처음 1조달러의 부를 거머쥔 사람이다. 그는 불모의 땅으로 여겨지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유전 개발 성공으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벌 줄만 알았지 쓰는 데는 인색했다.

그에게는 늘 ‘냉혹한 짠돌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그는 자기 사무실에 유료 전화기를 설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직원의 업무용 통화 외에는 거래처의 중요한 손님일지라도 모두 통화료를 내야 했다. 하루에 수억원씩 돈을 써도 평생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을 가진 사람답지 않은 처신이었다.

1973년 7월10일 로마에서 일어난 손자 존 폴 게티 3세(당시 16세) 납치사건도 냉혹한 수전노로서의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납치범들은 아이의 몸값으로 1700만달러를 요구했다. 속이 타들어 간 아들 존 폴 게티 2세가 아버지에게 몸값을 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억만장자는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납치범들은 그해 11월 한 신문사로 한쪽 귀와 머리카락을 넣은 상자를 보내왔다. 납치범들은 몸값을 내지 않으면 다른 쪽 귀도 절단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납치범들은 300만 달러로 몸값을 낮췄다. 게티는 그제야 220만달러를 주겠다고 답을 보냈고 손자는 겨우 풀려났다. 그러나 그가 낸 몸값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연리 4%로 빌려준 것이었다. 주위에서 비난이 빗발치자 게티는 만약 자신이 순순히 납치범의 요구에 응하면 17명의 손자들이 모방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랬다고 변명했다.

그가 아낌없이 지갑을 열 때는 여자를 유혹할 때와 예술품을 살 때 딱 두 경우뿐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돈을 벌자 그는 서둘러 사업을 정리하고 ‘미녀사냥’에 온 힘을 쏟았다. 물론 나중에 다시 사업에 복귀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혼도 다섯 번 했는데 다섯 번째 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2~4년 만에 이혼했다. 그는 이에 대해 “사업에 실패한 사람만이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꾸릴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가 가장 열심히 지갑을 연 것은 미술품을 살 때였다.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선 것은 1930년대부터다. 그는 미술품 구입책을 고용해 탐욕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미술품을 긁어모았다. 그는 그리스·로마 시대 조각 작품과 르네상스 시대 회화에 애정을 보였다. 그는 자선 행위는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만큼 차라리 인류의 유산인 예술품을 보존하는 데 돈을 쓰는 게 훨씬 유익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모은 미술품을 자신의 집에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렵자 미국 로스앤젤레스 퍼시픽 팔리사데스에 있는 자신의 저택 ‘게티빌라’를 확장해 전시공간을 만들고 이를 1974년부터 일반에 무료로 개방한다. 1976년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게티빌라와 그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을 게티재단에 기증했다. 재단은 게티빌라와 별도로 샌타모니카에 거대한 게티센터를 건설해 1997년 12월 개관했다. 대형 전시공간과 휴식공간, 연구자를 위한 다양한 시설이 들어섰다. 게티는 자신의 미술관 방문객에게 입장료와 주차료를 포함해 일절 비용을 부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곳은 오늘날 파리 루브르박물관, 대영박물관과 견줘 손색이 없는 미술관으로 통한다.

그는 한 저서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품을 통해 찬란한 문명뿐만 아니라 당대의 예술을 창조한 사람들에 대해 배울 수 있다”며 “이것은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술품의 정서적·교육적 효과를 꿰뚫어본 것이다.

살아생전 아무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던 게티는 이제 모든 미국인의 존경 대상이다. “후손에게 대대로 상속해야 할 것은 (석유)광산채굴권이 아닌 부드러움(즉 자신이 수집한 예술품)”이라던 그의 말은 이제 누구에게나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