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풀꽃들을 위한 변명
몽골 출장길에 하루를 잡아서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의 테를지 국립공원에 갔다. 초원의 나라라고 해도 이렇게 나라 전체가 풀밭인 줄은 몰랐다. 야생화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인 필자는 꽃 사진을 찍느라고 중간에 30분 샌드위치를 먹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6시간을 앉았다 일어섰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다가 결국은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풀밭을 서너 시간씩 걷는 일은 다반사였고, 우즈베키스탄에서도 하루 종일 풀밭을 헤맨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꽃을 밟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꽃이 가득한 벌판은 처음이었다.

요즘 은퇴 후에도 건강한 사람이 정말 많고 디지털카메라가 나온 뒤 사진을 찍는 것이 아주 값싼 취미가 됐다. 특히 초상권을 주장하지 않는, 따라서 모델료도 없는 야생화가 비교적 찍기도 쉬워 많은 사람들이 찍으러 다닌다. 대덕산, 금대봉, 함백산을 잇는 능선, 점봉산 곰배령,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 일대가 유명하다. 그러나 가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사실 그 면적이 보잘것없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기도 하지만 평지는 농사짓고 집과 공장을 짓는 데 써야 하고, 산은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조림국가로 알려져 있는 만큼 다 나무를 심어서 풀이 살 공간을 남겨 주지 않고 있다. 화전민이 일구고 살던 화전조차도 혹시라도 다시 경작을 할까 봐 즉각 나무를 다 심어 버렸다. 그리고 나무가 잘 자라라고 열심히 육림 사업을 해서 숲 속의 풀과 잡목을 열심히 제거해 버린다.

그런데 토양유실을 막고 물을 많이 보전하면서 토양미생물과 공생을 통해서 땅을 부드럽고 기름지게 하는 데는 풀이 큰 역할을 한다. 음지에서도 잘 자라는 풀이 나무와 같이 사는 숲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지라야 잘 사는 풀을 위한 공간도 의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양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아 관광지화된 대관령 양떼 목장과 같은 곳을 차라리 자연상태와 가장 가까운 다양한 풀이 사는 공간으로 조성한다면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즘 지자체들이 관광자원의 하나로 식물원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 식물원은 많아졌고 유지관리비가 만만치 않아 흔히 부실해진다. 내버려두면 자연이 알아서 만들어 주는 야생화 풀밭을 처음부터 조성하면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다른 지역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식물원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박병원 < 은행연합회장 bahk0924@yaho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