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계파 초월 못하면 黨 미래 없다"…새정치연합 계파갈등 어느 정도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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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 vs 비노 당권·공천싸움 11년
자파 이익 안맞으면 탈당도 불사
자파 이익 안맞으면 탈당도 불사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이 그동안 고질적 병폐로 꼽혀온 당내 계파 갈등 문제 해소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박 위원장은 6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그 부분(계파 갈등)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새정치연합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당 안팎에서 7·30 재·보궐 참패 이후 박 위원장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계파 갈등을 꼽고 있지만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새정치연합의 계파 갈등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도한 열린우리당 창당을 기점으로 친노계와 옛 민주계 간 갈등이 시작됐다. 노무현 정부 말기 대통령 지지율 하락으로 열린우리당은 또 한번 심각한 내홍을 겪는다. 탈당이 잇따르면서 사실상 당이 둘로 쪼개졌다. 이때 탈당파의 핵심 인물이 김한길 전 공동대표와 정동영 상임고문, 천정배 전 법무장관 등이다. 당에 남았던 대표적 잔류 인사로는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가 꼽힌다.
이들 두 세력 간 충돌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아울러 대선 전 영입됐지만 야권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손학규 상임고문, 대선 후 당 수습을 맡았던 정세균 상임고문 등도 착실히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2011년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손 고문의 주도로 민주통합당이 탄생했다. 2012년 초 전당대회에서 한 전 총리가 대표로 선출됐다. 이어 4월 실시된 19대 총선에서 친노계 인사들이 대거 공천을 받았다. 특히 ‘나꼼수’ 출신 김용민 후보의 막말 파문이 일면서 공천을 둘러싼 당내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이길 수 있었던 선거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한 전 총리가 물러났다.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기 위한 전당대회가 2012년 6월 치러졌다. 이해찬 전 총리와 김한길 전 공동대표가 맞붙었지만 아슬아슬한 표차로 이 전 총리가 이겼다. 김 전 대표는 친노계의 전횡을 강하게 비판하며 승부를 걸었지만 무릎을 꿇었다. 이후 대선 후보로 문재인 상임고문을 낸 친노계는 경선 과정에서 다른 계파의 거센 반발을 감내해야 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친노계는 2013년 비노계의 수장 격인 김한길 전 대표에게 당권을 내줬다. 그러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파문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세 결집에 성공했고 “김한길 지도부가 미온적인 대처로 정부·여당에 끌려다니고 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참여로 지난 3월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한 뒤에도 계파 갈등은 계속됐다. 6·4 지방선거에서 안 전 대표 측 윤장현 광주시장을 공천하자 범 친노계인 이용섭 전 의원이 탈당 후 출마했다. 7·30 재·보선에서도 기동민·권은희 후보 공천을 놓고 당내에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정치권 관계자는 “계파 갈등을 해소한다는 것은 곧 공천 과정에서의 잡음을 최대한 줄인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며 “학연 지연 혈연 등 ‘보스’와의 인연이 아닌 분명한 가치와 철학 중심의 정당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계파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
박 위원장은 6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그 부분(계파 갈등)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새정치연합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당 안팎에서 7·30 재·보궐 참패 이후 박 위원장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계파 갈등을 꼽고 있지만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새정치연합의 계파 갈등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도한 열린우리당 창당을 기점으로 친노계와 옛 민주계 간 갈등이 시작됐다. 노무현 정부 말기 대통령 지지율 하락으로 열린우리당은 또 한번 심각한 내홍을 겪는다. 탈당이 잇따르면서 사실상 당이 둘로 쪼개졌다. 이때 탈당파의 핵심 인물이 김한길 전 공동대표와 정동영 상임고문, 천정배 전 법무장관 등이다. 당에 남았던 대표적 잔류 인사로는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가 꼽힌다.
이들 두 세력 간 충돌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아울러 대선 전 영입됐지만 야권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손학규 상임고문, 대선 후 당 수습을 맡았던 정세균 상임고문 등도 착실히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2011년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손 고문의 주도로 민주통합당이 탄생했다. 2012년 초 전당대회에서 한 전 총리가 대표로 선출됐다. 이어 4월 실시된 19대 총선에서 친노계 인사들이 대거 공천을 받았다. 특히 ‘나꼼수’ 출신 김용민 후보의 막말 파문이 일면서 공천을 둘러싼 당내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이길 수 있었던 선거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한 전 총리가 물러났다.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기 위한 전당대회가 2012년 6월 치러졌다. 이해찬 전 총리와 김한길 전 공동대표가 맞붙었지만 아슬아슬한 표차로 이 전 총리가 이겼다. 김 전 대표는 친노계의 전횡을 강하게 비판하며 승부를 걸었지만 무릎을 꿇었다. 이후 대선 후보로 문재인 상임고문을 낸 친노계는 경선 과정에서 다른 계파의 거센 반발을 감내해야 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친노계는 2013년 비노계의 수장 격인 김한길 전 대표에게 당권을 내줬다. 그러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파문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세 결집에 성공했고 “김한길 지도부가 미온적인 대처로 정부·여당에 끌려다니고 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참여로 지난 3월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한 뒤에도 계파 갈등은 계속됐다. 6·4 지방선거에서 안 전 대표 측 윤장현 광주시장을 공천하자 범 친노계인 이용섭 전 의원이 탈당 후 출마했다. 7·30 재·보선에서도 기동민·권은희 후보 공천을 놓고 당내에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정치권 관계자는 “계파 갈등을 해소한다는 것은 곧 공천 과정에서의 잡음을 최대한 줄인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며 “학연 지연 혈연 등 ‘보스’와의 인연이 아닌 분명한 가치와 철학 중심의 정당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계파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