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덫에 걸린 보건의료산업
인터넷 등 오늘의 정보기술(IT)산업이 미국 국방과 연관이 많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반을 차지하는 국방이 IT 혁명의 진원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넥스트 혁명’은 어디서 올 건가. 전문가들은 보건의료 분야를 빼놓지 않는다. 급속한 고령화 추세 등 수요 측면의 트렌드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에서 보건의료가 국방 다음으로 R&D 예산이 많다는 공급 측면의 혁신 가능성도 큰 요인이다.

보건의료산업은 이미 ‘혁신’을 넘어 ‘혁명’의 기운이 감지될 정도로 질주하는 양상이다. 기술경제학자 리처드 넬슨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제도’ ‘새로운 기업가’를 혁명의 ‘세 가지 조건’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보건의료산업에서 맞아떨어질 조짐이다.

“이건 ‘넥스트 혁명’이야”

파괴적 혁신기술이 속속 등장한다는 게 그렇다. 빅데이터, 3차원(3D) 프린팅, 웨어러블 기기, 줄기세포 재생의학, 유전체 맞춤의학 등이 보건의료산업에서 게임의 룰을 바꿀 태세다. 기존 제도의 틀도 바닥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당장 일반인과 환자, 건강관리와 치료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국제 의료관광 등 국경도 사라지고, 의료의 시·공간 개념도 통째로 변하고 있다. 한마디로 보건의료의 전통적 경계가 모조리 붕괴되는 추세다. 마지막으로 ‘사용자 혁신(user innovation)’으로 새로운 기업가가 출현하고 있다. 의사의 의료기기 발명은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 의대와 이공계의 구분 자체가 구태일 정도다. 약사에 의한 창업, 심지어 환자에 의한 신제품 개발도 줄을 잇고 있다.

이 흐름을 주도하는 국가는 단연 미국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IT 혁명에 이어 보건의료 혁명을 주도하리라는 데 이견이 없다. 오히려 관심은 그 뒤를 쫓는 국가가 어디냐로 모아진다. 뒤늦게 혁명의 가능성을 간파한 국가들의 치열한 경주가 이미 시작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일본이 보건의료산업 베팅을 선언했다. 중국 역시 팔을 걷어붙였다.

‘복지’에 짓눌린 한국 ‘보건’

문제는 한국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원격진료 하나 해결 못해 수십년째 시범사업이라는 쳇바퀴만 돌리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영리 자회사조차 반대가 극심한 상황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제한된 건강보험 안에서 ‘수가 다툼’ ‘착취 게임’ ‘직역 갈등’만 벌이자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더 어려울 때 중화학공업이라는 승부수를 던지고, IT 물결을 제때 올라타면서 여기까지 달려온 한국이다. 그런 나라가 눈앞에 다가온 보건의료 혁명을 빤히 보고도 단 한 발짝도 못 나가는 형국이다. 비전도 없고, 리더십도 안 보인다.

창조경제를 내세운 이 정부가 미래창조과학부를 만들 게 아니었다. 이제는 민간에 맡겨야 더 잘 돌아갈 IT에 정부가 자꾸 개입을 하려는 것 자체가 패착이었다. 오히려 이 정부는 넥스트 혁명의 진원지로 부상하는 보건의료산업의 구각을 깨뜨리는 데 승부를 걸었어야 했다. 법·제도 혁신은 정부의 몫이다. 보건복지부에서 ‘복지’를 떼어 내든지, ‘보건’을 떼어 내든지 양단간 결단을 내야 할 판이다.

불행히도 복지라는 정치적 논리 앞에 보건의료가 죽어가기는 이 정부도 마찬가지다. 규제 개혁을 외치지만 보건의료 개혁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정부다. 정부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한다지만 벌써부터 3년 후 대한민국이 걱정이다.

안현실 경영과학 전문논설위원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