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하태임 씨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통로(Un passage)’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며 웃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서양화가 하태임 씨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통로(Un passage)’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며 웃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1989년 11월, 아버지(한국 추상화의 거장 하인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957년 한국미술가협회를 창립할 만큼 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부친의 그림을 다시 꺼내 보며 가슴을 쳤다. 작가 생활이 그토록 힘든 줄 몰랐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영향을 한사코 부정했지만 슬픔은 갈수록 커졌다. 그 슬픔을 넘어서기 위해 빠져든 게 추상화의 매력이었다. 서양화가 하태임(41·삼육대 교수)이 추상화 ‘컬러 밴드(color band·색띠)’로 사부곡(思父曲)을 부르는 사연이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한경갤러리에서 11~22일 개인전을 여는 하씨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을 잊기 위해 지난 20년간 추상화 작업에 몰두했다”며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얼마나 성실한 모습으로 부친이 살아왔는가를 당당히 추상예술로 승화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때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변형된 인물화에 천착한 하씨는 부친이 작고한 뒤 현대인의 소통을 추상미술에서 뽑아내리라 다짐했다. 1990년대 초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 디종 국립미술학교,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파리 보자르)에서 회화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추상표현주의’ 화풍으로 선회했다. 유학 시절 어머니(서양화가 유민자)의 간곡한 당부도 힘이 됐다. 1999년에는 모나코 국제 현대 회화전에 참가한 그는 색띠 그림 ‘통로(Un passage)’를 출품해 국내 작가로는 처음으로 모나코 왕국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씨는 “디지털 시대 현대인의 소통을 일깨우는 색띠 작업은 추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딸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가는 그림으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첨단사회에서의 소통 부재와 소외를 생각하는 그의 특별한 마음은 이번 전시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전시회 주제를 ‘디지털 노마드(nomad)시대, 길을 묻다’로 정하고 알록달록한 색띠 작업 ‘통로(Un passage)’ 시리즈 20여점을 내보인다.

밝고 투명한 색띠 그림에는 부친을 여의고 아픈 편린을 곰삭이며 희망을 놓치 않는 장인 정신이 녹아 있다. 작업 공정은 복잡하다. 언뜻 보면 캔버스 위에 큰 붓으로 한 번 휙 그은 것 같지만 색띠 하나를 그리려면 보통 수차례에서 많게는 수십 차례 붓질을 해야 한다. 아크릴 물감을 묽게 만들어서 투명하게 한 획을 긋고 마를 때까지 기다려 그 위에 또 칠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하씨는 자신의 색띠 작품에 대해 “붓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산소를 내뿜는 일종의 광합성미학”이라며 “말과 문자를 뛰어넘어 색깔을 통해 소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젊은 시절 ‘소통’을 화두로 캔버스에 온통 문자와 부호를 채워넣었는데, 어느 순간 진정한 소통에 언어, 문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캔버스에서 문자와 부호를 지워가기 시작한 거죠.”

그런 과정이 지금의 색띠 작업으로 이어졌다. 색상마다 작가가 부여한 고유한 의미나 이야기도 있다. 이를테면 노란색 띠는 찬란한 기억이나 아이디어의 원천, 청색 띠는 평화, 황색 띠는 권력, 흰색 띠는 위로, 빨간 띠는 열정, 분홍 띠는 사랑 등을 의미하는 식이다.

하씨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 추상의 장점과 색깔 미학을 융합해 현대인의 복합적이고 미묘한 감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비정형) 운동에 참여하며 추상미술에 전념한 아버지와 디지털 시대 추상화의 접점을 찾아 나선 까닭이다.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