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도요타처럼 합시다.”

2001년 홍콩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LG전자 등의 정보기술(IT) 제품을 수요처에 공급하는 일을 맡았던 LG상사는 늘 재고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거래처에서 급하게 제품을 보내달라고 하면 한국에서 물건을 받아다 전달하는 데 적어도 며칠이 걸렸다. 한국에 재고가 없으면 더 곤란했다. 제때 생산량이 늘지 않아 거래처와 약속을 못 지키는 일도 왕왕 일어났다.

LG상사 홍콩법인장은 도요타의 ‘저스트 인 타임(JIT)’ 제도를 모방하자고 했다. 아예 홍콩법인이 일정 규모의 재고를 운용하고, 거래처 요청을 한국 생산량에 즉각 반영하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당시엔 혁신적인 일이었다. 물류 및 전산시스템을 완전히 새로 갖춰야 하고 재고 예측에 실패할 가능성도 컸다. 홍콩법인이 재고를 자유로이 운용하다 연말에 한꺼번에 정산하려면 LG전자를 비롯해 한국 공급업체들이 줄줄이 회계처리 방식을 바꿔야 했다.

그래도 밀어붙였다. “빡빡한 관리만 강조하면 사업을 못한다”며 서울 본사와 한국 내 공급사를 설득했다. 요청 즉시 물건을 받을 수 있게 된 수요처들은 크게 반겼다. 결국 홍콩법인뿐 아니라 LG상사의 다른 주요 해외법인들도 비슷한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지금은 경쟁사들 가운데서도 LG상사를 따라 하는 곳이 상당수다. 당시 홍콩법인장이 지난 5월 LG상사 최고경영자(CEO)가 된 송치호 대표이사다.

일이 곧 취미

송 대표는 올해로 딱 30년간 LG상사에서 일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금융기관은 답답하고 막혀 있는 것 같아서 싫었고, 활동적인 상사에서 일하고 싶어서’ 럭키금성상사(LG상사의 전신)에 1984년 7월1일자로 들어갔다.

30년간 한 회사에 다녔으니 거의 모든 직원은 그와 직·간접적으로 같이 일한 경험이 있다. 송 대표에 대한 이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엄청난 워커홀릭’이라는 것이다.

한 직원은 “단단한 체구로 불도저처럼 일한다”고 했다. 다른 직원은 “밤늦게까지 야근하고, 날이 밝도록 술을 마시고도 아침에 일찍 나와서 부하들을 채근하는 식”이라며 “타고난 체력과 추진력, 높은 업무 몰입도 등이 결합돼 주변 사람이 따라가기 버겁다고 느낄 정도”라고 평했다.

송 대표 스스로도 “타고 난 성격이 그렇다”고 인정한다. 간혹 완전히 진이 빠지도록 일을 한 뒤 무력감을 느낄 때(번아웃증후군)도 있지만, 그냥 머리를 비우고 업무에 복귀하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곤 주변 사람들에게는 “LG상사는 내가 평생을 바친 회사며,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단한 회사인데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고 말하는 식이다. 듣는 사람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대표이사에 오른 뒤엔 ‘일을 완벽하게 하지 못할까’ 걱정돼 자제하고 있지만, 이전까지는 회사에서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주량을 자랑하기도 했다.

숫자 틀리면 ‘불호령’

송 대표는 재무통이다. 영업통 출신의 종합상사 CEO가 많지만, 그는 아니다.

그도 처음부터 ‘재무’ 분야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송 대표는 “1980년대 중반에는 석유화학 제품은 석유화학 전공자가 판매하는 게 맞다는 세일즈 엔지니어 개념이 유행했기 때문에 상경계를 나온 사람은 자동으로 재무 부문에 배치됐다”고 전했다.

13년간 재무 부문에서 근무한 뒤 홍콩법인 부장으로 발령받았다. 드디어 영업맨이 됐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1998년 외환위기가 터졌다. 홍콩 근무기간 내내 돈을 구하러 백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그전까지는 LG전자 물량을 취급하는 LG상사가 ‘갑(甲)’이었는데, 순식간에 ‘을(乙)’로 입장이 바뀌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수호 당시 LG상사 대표가 그를 눈여겨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재무통인줄 알았던 그가 영업까지 두루 꿰뚫는 해법을 자주 제시했기 때문이다. 홍콩법인장으로 임명된 뒤 추진한 도요타식 재고관리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는 “이후 회사 배려에 힘입어 인도네시아 지역총괄, 자원 및 원자재부문장을 지내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힘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무 업무를 오래 맡은 덕분에 정확성·정직성을 추구하는 습관이 배어 있다. 그는 “상사맨이니까 좀 주먹구구식으로 영업해도 된다는 태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LG상사에선 해외주재원 파견 발령을 받은 직원이 잔여 업무 처리를 구실로 서울 본사에서 일하다 ‘호랑이 송 대표’의 눈에 띄어 경을 쳤다거나, 지금 수수료가 잘 나온다는 이유로 잠재적 투자 손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가 그의 불같은 화를 산 사례가 수시로 공유된다.

오너처럼 배짱·뚝심 있어야

송 대표는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다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전문경영인처럼 행동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배짱도 좀 부리고, 뚝심을 갖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CEO가 되면 외부에서 하는 말에 휘둘려서 회사 이익보다 내 명성을 앞세우는 결정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며 “LG상사는 무슨 무슨 유망 사업에 왜 진출하지 않느냐 이런 말에 떠밀려서, 그리고 조바심에 뭔가를 추진하면 일을 그르친다”고 경계했다.

직원들에게도 늘 ‘안 해도 좋으니까 (결정을) 서두르지 마라’고 말한다. 직원이 보고서에 ‘외부기관 한 곳에서 검증을 받았다’고 적어내면 “두 곳 이상의 기관에서 검증을 받아야 제대로 한 거 아니냐. 다시 해 오라”고 물리치는 식이다. “이 사업만큼은 우리가 꼭 해야 한다는 식의 명분이 앞서는 프로젝트일수록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론이다.

특히 자원 사업을 할 때는 잘 버티는 게 관건이다. 송 대표는 “일본 종합상사들을 보면 조급하게 들어가지도, 조급하게 철수하지도 않는다”며 “진득하게 기다릴 줄 알기 때문에 한국의 10배 규모로 자원 개발에 투자하면서도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목표는 LG상사의 퀀텀점프

송 대표의 목표는 LG상사의 ‘퀀텀점프’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는 “예전처럼 여기서 물건 떼어서 저기다 파는 뜨내기 장사로는 살아남기 힘든 시대”라며 자원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에 투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석탄 화물을 부리는 터미널 등이다.

송 대표는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안정적인 ‘블루칩’ 수익원을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기적으로 실적을 올려서 거품 만든 사람이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며 “그 과실이 수년 후 내가 퇴임한 다음에 돌아오더라도 이 회사가 큰 폭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송치호 대표 프로필

△1959 년 서울 출생 △서울 영등포고,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럭키금성상사 입사(1984년) △LG상사 홍콩법인장(2001년) △재경담당 상무(2006년) △산업재2부문장 전무(2009년) △인도네시아 지역총괄 전무(2011년) △자원·원자재부문장 부사장(2013년) △LG상사 각자 대표이사(2014년 3월) △LG상사 단독 대표이사(2014년 5월~현재)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