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눈먼 자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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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했던 것들과 갑작스런 결별
자존감과 유대감 길러야 극복해
김경록 <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grkim@miraeasset.com >
자존감과 유대감 길러야 극복해
김경록 <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grkim@miraeasset.com >
포르투갈 출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의 설정은 실로 충격적이다. 한 명이 갑자기 눈이 멀면서 급속도로 전염돼 다들 눈이 멀어버리게 된다. 어떤 이들은 수용소로 가거나 집에 숨어 있기도 하고, 거리는 난장판이 된다. 눈이 멀면서 지금까지 익숙하게 지내왔던 것들과 결별한다. 권력도, 학력도, 큰 집도 모두 소용없다. 새로운 형태와 개념의 세상이 열린다.
갑자기 눈이 먼 자들의 세상은 비현실적 설정이 아니라 어디에나 우화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얘기다. 퇴직을 해도 이런 세상이 펼쳐진다. 소유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누리던 지위가 사라진다. 회사에서 편의를 제공해주던 부분이 모두 없어지고 주위에 그 많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려 해도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정체성이 사라져 버린다.
지인 한 분은 직장을 갑자기 그만둔 지 며칠 안 돼 친구가 있는 직장을 방문했다. 그런데 정문에 있던 경비가 출입자 관리를 위해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어보길래 보여줄 명함이 없어서 얼떨결에 “집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명함 하나 있고 없고가 이렇게 다르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소설에서는 눈이 먼 세상에서 상실감과 폭력만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눈먼 세상을 헤쳐가는 한 무리에 초점을 맞춘다.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명인 의사 아내의 돌봄과 인도로 그녀가 속한 무리의 사람들은 무사히 살아 남아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이 무리의 사람들은 양보하고 믿고 서로 연대하면서 위기를 벗어난다.
퇴직이라는 또 다른 눈 먼 세상에서 길라잡이는 어떤 것일까. 자존감과 유대가 아닐까 싶다. 자존감이란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신의 가치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일반성, 구체성이 아닌 더 나아가서 특이성(uniqueness)을 가진 존재가 바로 ‘나’이다. 자존감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다. 나이가 들든, 직장이 없어지든, 부하가 사라지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의 존재를 인정하면 된다.
주위와 유대도 중요하다. 가까이는 아내와 자식과의 유대가 있다. 이 작은 것도 쉽지 않다. 나아가서 친구와의 유대, 이웃과의 유대, 그리고 종교와의 유대도 필요하다. 끈과 띠처럼 서로 묶고 있어야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록 <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grkim@miraeasset.com >
갑자기 눈이 먼 자들의 세상은 비현실적 설정이 아니라 어디에나 우화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얘기다. 퇴직을 해도 이런 세상이 펼쳐진다. 소유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누리던 지위가 사라진다. 회사에서 편의를 제공해주던 부분이 모두 없어지고 주위에 그 많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려 해도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정체성이 사라져 버린다.
지인 한 분은 직장을 갑자기 그만둔 지 며칠 안 돼 친구가 있는 직장을 방문했다. 그런데 정문에 있던 경비가 출입자 관리를 위해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어보길래 보여줄 명함이 없어서 얼떨결에 “집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명함 하나 있고 없고가 이렇게 다르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소설에서는 눈이 먼 세상에서 상실감과 폭력만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눈먼 세상을 헤쳐가는 한 무리에 초점을 맞춘다.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명인 의사 아내의 돌봄과 인도로 그녀가 속한 무리의 사람들은 무사히 살아 남아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이 무리의 사람들은 양보하고 믿고 서로 연대하면서 위기를 벗어난다.
퇴직이라는 또 다른 눈 먼 세상에서 길라잡이는 어떤 것일까. 자존감과 유대가 아닐까 싶다. 자존감이란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신의 가치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일반성, 구체성이 아닌 더 나아가서 특이성(uniqueness)을 가진 존재가 바로 ‘나’이다. 자존감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다. 나이가 들든, 직장이 없어지든, 부하가 사라지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의 존재를 인정하면 된다.
주위와 유대도 중요하다. 가까이는 아내와 자식과의 유대가 있다. 이 작은 것도 쉽지 않다. 나아가서 친구와의 유대, 이웃과의 유대, 그리고 종교와의 유대도 필요하다. 끈과 띠처럼 서로 묶고 있어야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록 <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grkim@miraeasse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