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오페라는 찾아보면서 창극엔 싸늘한 시선…그래, 나부터 보고싶은 작품 만들자 목표 세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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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아닌 '촉'으로 익힌 연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무대 올라
배우는 고통스럽지만 가장 잘 맞는 옷
인생 조급해 말아요
쉰 살 넘어 1인 32역 '벽속의 요정' 연기
다들 옛날보다 지금이 더 전성기래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무대 올라
배우는 고통스럽지만 가장 잘 맞는 옷
인생 조급해 말아요
쉰 살 넘어 1인 32역 '벽속의 요정' 연기
다들 옛날보다 지금이 더 전성기래요
연극배우인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64)의 뜨개질 실력은 수준급이다. 목도리 모자는 기본이고 스웨터와 외투까지 직접 떠서 입는다. 2010년 환갑잔치 대신 ‘일곱 가지 마음 담긴 따뜻한 손뜨개’란 책을 냈다. 그는 문화예술계 지인에게도 한 코 한 코 정성스럽게 만든 뜨개옷을 선물한다. 골수팬도 생겼다. 안호상 국립극장장은 겨울이 되면 김 감독이 떠준 니트를 주말마다 입는다. 지난 12일 ‘한경과 맛있는 만남’을 위해 서울 신당동에 있는 카페 ‘벗’을 찾았을 때 김 감독은 직접 뜬 여름용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이곳은 그의 뜨개질 스승이 3년 전 소개해 준 식당이다. 사찰음식을 기반으로 한 한식을 판다. 불교신자인 그는 가끔 생각날 때마다 들른단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예술 DNA
‘뜨개질’은 그에게 다 아문 상처와 같다. 배우, 창극단 예술감독, 중앙대 국악과 교수, 문화융성위원회 민간위원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에게도 좌절의 시간이 있었다. 역경은 1968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집안을 사실상 꾸려나가던 어머니가 갑작스레 쓰러진 것. 모친은 1950~1960년대 여성국극(여성이 남성 역할까지 맡아 하는 창극)으로 이름을 떨친 고(故) 박옥진 여사다. 어머니는 배우 출연료 외에 나오는 식대와 밤참비를 아껴서 6남매를 먹이고 입혔다. 극본가이자 연출가였던 아버지 김향 선생(1999년 작고)은 평생을 바람같이 살아갔다. 집안은 스르르 무너졌다.
“고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어요. 서울 삼양동 옥탑방으로 이사해 줄줄이 딸린 동생들까지 제가 챙겨야 했습니다. 충격으로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났어요. 당시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당을 받고 수출용 아기옷을 뜨는 소일을 했는데 시간을 보낼 겸 저도 배우게 됐어요.”
아주머니들은 솜씨가 좋다며 그에게 일감을 자꾸 갖다 줬다. 실과 바늘로 꿰어낸 2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 “사람이 바닥을 치면 올라온다고 하잖아요. 어느 순간 ‘이제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간이 저를 치유해준 셈이죠.”
이때 주문한 비빔발우 조치발우 카레발우 등의 음식이 나왔다. 발우란 승려들이 식사할 때 사용하는 식기를 말한다. 1인용 식판에 단품 요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직사각형 그릇에 담긴 비빔밥 재료를 사발에 넣고 슥슥 비볐다. 담백한 맛이 벌써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조치발우는 흔히 고추장찌개라고 부르는 음식. 고기가 들어있지 않아 어린 시절 먹던 그맛 그대로다. 술 마신 다음날 먹으면 제격인 맛. 비빔발우에 나온 미역국은 버섯으로 국물을 내 그런지 담백하면서 구수하다.
그는 다섯 살 때 처음 무대에 섰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천막무대에 섰던 어머니의 아역을 맡았다. 연기 인생으로만 환갑이 넘었다. 그는 오는 30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유리동물원’에서 아만다 역을 맡아 무대에 서고 있다. 기운이 펄펄 넘치는 그를 보고 원로 연극배우인 오현경 선생은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부모님이 큰 재산을 물려주신 거죠. 어머니에게선 몇 십년을 노래해도 지치지 않는 목소리를 물려받았고, 아버지에게선 연극적인 감성을 이어받았죠. 젊은 시절 당장 먹을 쌀이 없어도 연극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이에요. 아버지가 함경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진도 사람이에요. 두 군데 모두 옛날 유배지였습니다. 유배지 사람들이 머리가 좋고 예인 기질이 발달했다고 들었는데…그 피를 물려받았나봐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재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은 배우
남편인 연출가 손진책 씨는 김 감독을 두고 “아내는 스물네 시간을 그물 짜듯 산다”고 했다. 1976년 연극 ‘한네의 승천’을 시작으로 연극무대에 선 그는 지금껏 연극 ‘오장군의 발톱’ ‘남사당의 하늘’ ‘최승희’ ‘벽속의 요정’, 뮤지컬 ‘에비타’ ‘영웅만들기’, 매해 10만명이 넘는 관객이 찾는 마당놀이 ‘심청전’ ‘춘향전’ ‘놀부전’ 등 수많은 작품으로 부지런히 무대에 올랐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무대에 섰어요. 연기를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촉(觸·주관과 객관의 접촉 감각을 말하는 불교용어)으로 배웠어요. 교수 예술감독 등 여러 개의 명함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무대에 서는 배우 역할이 아닌가 해요. 물론 연기가 마냥 즐겁지는 않아요. 질책을 받아 고통스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은 배우예요.”
그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무대는 한국 색채가 짙은 창작 무대라고 꼽았다.
“그동안 창작연극에 주로 섰어요.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대중의 관심이 싸늘했거든요. 작품에 대한 평가도 야박했고요. 우리나라 공연계에선 서양연극을 하면 굉장히 칭송하고 높이 평가해주지만 창작극은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굴하지 않고 창작연극부터 마당놀이 무대에 서며 꾸준히 걸어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저를 단단하게 해주는 여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번에 ‘유리동물원’ 작품을 할 때도 연출가인 한태숙 씨와 ‘우리 번역극 흉내내는 연극은 하지 말자’고 의견을 맞췄어요.”
김 감독의 대표작은 1인 32역을 소화하는 연극 ‘벽속의 요정(2005년 초연)’이다. 무대에 선 그를 두고 평론계에선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보다 오히려 뒤늦게 김 감독의 진가를 발견했다. “후배들에게도 이야기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요. 인생을 마라톤처럼 생각하고 숨을 고르면서 목표 지점까지 가면 되는 거예요. 지금 잠시 반짝반짝 한다고 목표를 빨리 이루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고 인생 다 끝난 거 아니에요. 다만 한눈 팔지 말고 꾸준히 하세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왜 빨리 이룰 수 없냐고 좌절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골돌품 취급받던 국립창극단에 새바람 불어넣어
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또순이 기질로 남편이 연극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손 감독은 이를 두고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아내”라고 하기도 했다. 그는 “그말이 맞아요. 남편은 연극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어요. 대신 제가 가장 노릇을 했죠. 게다가 출연료를 안 줘도 되는 배우가 항상 준비돼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반대로 오늘날 김성녀를 만든 것도 남편이에요. 남편은 ‘당신은 재능이 있는 사람인데 그것을 학문적으로 보충하면 더 좋겠다’며 저에게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줬죠.”
주문한 김치전과 해물파전이 나왔다. 전에는 묵은지와 오징어가 많이 들어있다. 한 입 베어 무니 저절로 막걸리 생각이 났다. 바삭바삭하고 고소하다. 김 감독은 김치전을 입에 넣으며 “젊었을 때는 음식을 이것저것 맛보는 편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점점 적게 먹게 된다”며 “이곳 음식은 부담이 덜하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3월부터 국립창극단의 수장을 맡고 있다. 1978년부터 3년간 창극단 단원이기도 했던 그는 이곳에 오기 전 결심한 게 하나 있다. 공연 담당 기자들이 창극 공연을 보게 만들겠다는 것. “기자들이 ‘기사는 써도 공연은 안 본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자극을 받았어요. 나부터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죠.”
김 감독이 취임한 뒤 국립창극단은 ‘배비장전’ ‘서편제’ ‘장화홍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 숱한 히트작을 냈다. 한태숙 고선웅 등 연극계의 스타 연출가들을 섭외해 창극을 만든 게 주효했다. 스릴러 창극, 청소년 창극, 18금 창극 등 창극을 특성화해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
“한태숙 연출가가 만든 창극 ‘장화홍련’을 처음 선보였을 때 반향이 컸어요. 당시 창극계에선 이게 창극이냐 연극이냐 논란이 됐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매진 사례로 답해줬죠. 이런 것도 창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창극 관객을 넓히기 위해선 창극이란 줄기를 다양하게 키워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단단한 거목이 돼 창극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체력관리 비법은 뭘까.
“10년 전쯤 제가 몸이 안 좋았어요. 당시 한 팬이 저를 1주일에 한 번 전국의 명산에 데리고 갔어요. 55회나 됐죠. 백두산과 중국 후탸오샤(虎跳峽), 네팔 안나푸르나도 등반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등산하니까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거 있죠.”
그는 지금도 후배 배우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산다. “원로배우도 신인과 경쟁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난 오래됐고 경력 많은 사람이니까 이만큼만 해야지…이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훈아와 남진이 서로 경쟁하며 최고의 스타가 된 것처럼 예술은 경쟁을 통해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만 더 외치다…결국 링거 맞은 사연
이달 초 김성녀 감독은 연극 ‘유리동물원’ 연습 도중 링거를 맞았다. 피로가 누적된 탓이다. 명동예술극장 홍보팀 직원들이 “제발 몸을 생각해서 쉬엄쉬엄하시라”고 해도 “한 번만 더”를 외치는 그다. 명동예술극장 분장실에는 김 감독 전용 간이 침대가 있다. 너무 힘들면 잠시 누웠다 다시 연습한다는 그. 올해 예순넷을 맞은 그의 열정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김성녀 감독의 단골집 벗 모든 메뉴에 조미료 · 고기 안 들어간 담백한 사찰음식
서울 신당동에 있는 카페 ‘벗’은 같은 건물 5층에 있는 향철선원(禪院) 유혜림 원장이 2005년부터 운영하는 식당이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자는 게 운영 방향. 선원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사찰음식을 기반으로 한 메뉴가 주종이다. 모든 메뉴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해산물은 쓴다. 음식에 조미료를 일절 쓰지 않고 멸치 다시마 굴 조개 등 천연 재료로 맛을 낸다.
메뉴는 단출하다. 식사로는 조치발우 카레발우 비빔발우 웰빙제비 팥칼국수 된장칼국수 등 여섯 가지(각 7000원). 여기에 곁들일 만한 음식으로는 해물파전(1만5000원)과 김치전(1만2000원)이 있다. 음식맛은 담백하고 깔끔하다.
술도 판다. 맥주 소주 막걸리는 4000원, 와인은 4만~7만원이다. 오전 11시30분에 문을 열어 오후 10시까지 영업한다. 토요일은 오후 5시까지 운영하고, 일요일은 휴무.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6호선 약수역 방향으로 도보로 10분 걸린다. (02)2254-1053 김인선/송태형 기자 inddo@hankyung.com
이곳은 그의 뜨개질 스승이 3년 전 소개해 준 식당이다. 사찰음식을 기반으로 한 한식을 판다. 불교신자인 그는 가끔 생각날 때마다 들른단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예술 DNA
‘뜨개질’은 그에게 다 아문 상처와 같다. 배우, 창극단 예술감독, 중앙대 국악과 교수, 문화융성위원회 민간위원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에게도 좌절의 시간이 있었다. 역경은 1968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집안을 사실상 꾸려나가던 어머니가 갑작스레 쓰러진 것. 모친은 1950~1960년대 여성국극(여성이 남성 역할까지 맡아 하는 창극)으로 이름을 떨친 고(故) 박옥진 여사다. 어머니는 배우 출연료 외에 나오는 식대와 밤참비를 아껴서 6남매를 먹이고 입혔다. 극본가이자 연출가였던 아버지 김향 선생(1999년 작고)은 평생을 바람같이 살아갔다. 집안은 스르르 무너졌다.
“고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어요. 서울 삼양동 옥탑방으로 이사해 줄줄이 딸린 동생들까지 제가 챙겨야 했습니다. 충격으로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났어요. 당시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당을 받고 수출용 아기옷을 뜨는 소일을 했는데 시간을 보낼 겸 저도 배우게 됐어요.”
아주머니들은 솜씨가 좋다며 그에게 일감을 자꾸 갖다 줬다. 실과 바늘로 꿰어낸 2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 “사람이 바닥을 치면 올라온다고 하잖아요. 어느 순간 ‘이제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간이 저를 치유해준 셈이죠.”
이때 주문한 비빔발우 조치발우 카레발우 등의 음식이 나왔다. 발우란 승려들이 식사할 때 사용하는 식기를 말한다. 1인용 식판에 단품 요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직사각형 그릇에 담긴 비빔밥 재료를 사발에 넣고 슥슥 비볐다. 담백한 맛이 벌써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조치발우는 흔히 고추장찌개라고 부르는 음식. 고기가 들어있지 않아 어린 시절 먹던 그맛 그대로다. 술 마신 다음날 먹으면 제격인 맛. 비빔발우에 나온 미역국은 버섯으로 국물을 내 그런지 담백하면서 구수하다.
그는 다섯 살 때 처음 무대에 섰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천막무대에 섰던 어머니의 아역을 맡았다. 연기 인생으로만 환갑이 넘었다. 그는 오는 30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유리동물원’에서 아만다 역을 맡아 무대에 서고 있다. 기운이 펄펄 넘치는 그를 보고 원로 연극배우인 오현경 선생은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부모님이 큰 재산을 물려주신 거죠. 어머니에게선 몇 십년을 노래해도 지치지 않는 목소리를 물려받았고, 아버지에게선 연극적인 감성을 이어받았죠. 젊은 시절 당장 먹을 쌀이 없어도 연극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이에요. 아버지가 함경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진도 사람이에요. 두 군데 모두 옛날 유배지였습니다. 유배지 사람들이 머리가 좋고 예인 기질이 발달했다고 들었는데…그 피를 물려받았나봐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재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은 배우
남편인 연출가 손진책 씨는 김 감독을 두고 “아내는 스물네 시간을 그물 짜듯 산다”고 했다. 1976년 연극 ‘한네의 승천’을 시작으로 연극무대에 선 그는 지금껏 연극 ‘오장군의 발톱’ ‘남사당의 하늘’ ‘최승희’ ‘벽속의 요정’, 뮤지컬 ‘에비타’ ‘영웅만들기’, 매해 10만명이 넘는 관객이 찾는 마당놀이 ‘심청전’ ‘춘향전’ ‘놀부전’ 등 수많은 작품으로 부지런히 무대에 올랐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무대에 섰어요. 연기를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촉(觸·주관과 객관의 접촉 감각을 말하는 불교용어)으로 배웠어요. 교수 예술감독 등 여러 개의 명함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무대에 서는 배우 역할이 아닌가 해요. 물론 연기가 마냥 즐겁지는 않아요. 질책을 받아 고통스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은 배우예요.”
그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무대는 한국 색채가 짙은 창작 무대라고 꼽았다.
“그동안 창작연극에 주로 섰어요.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대중의 관심이 싸늘했거든요. 작품에 대한 평가도 야박했고요. 우리나라 공연계에선 서양연극을 하면 굉장히 칭송하고 높이 평가해주지만 창작극은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굴하지 않고 창작연극부터 마당놀이 무대에 서며 꾸준히 걸어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저를 단단하게 해주는 여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번에 ‘유리동물원’ 작품을 할 때도 연출가인 한태숙 씨와 ‘우리 번역극 흉내내는 연극은 하지 말자’고 의견을 맞췄어요.”
김 감독의 대표작은 1인 32역을 소화하는 연극 ‘벽속의 요정(2005년 초연)’이다. 무대에 선 그를 두고 평론계에선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보다 오히려 뒤늦게 김 감독의 진가를 발견했다. “후배들에게도 이야기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요. 인생을 마라톤처럼 생각하고 숨을 고르면서 목표 지점까지 가면 되는 거예요. 지금 잠시 반짝반짝 한다고 목표를 빨리 이루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고 인생 다 끝난 거 아니에요. 다만 한눈 팔지 말고 꾸준히 하세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왜 빨리 이룰 수 없냐고 좌절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골돌품 취급받던 국립창극단에 새바람 불어넣어
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또순이 기질로 남편이 연극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손 감독은 이를 두고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아내”라고 하기도 했다. 그는 “그말이 맞아요. 남편은 연극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어요. 대신 제가 가장 노릇을 했죠. 게다가 출연료를 안 줘도 되는 배우가 항상 준비돼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반대로 오늘날 김성녀를 만든 것도 남편이에요. 남편은 ‘당신은 재능이 있는 사람인데 그것을 학문적으로 보충하면 더 좋겠다’며 저에게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줬죠.”
주문한 김치전과 해물파전이 나왔다. 전에는 묵은지와 오징어가 많이 들어있다. 한 입 베어 무니 저절로 막걸리 생각이 났다. 바삭바삭하고 고소하다. 김 감독은 김치전을 입에 넣으며 “젊었을 때는 음식을 이것저것 맛보는 편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점점 적게 먹게 된다”며 “이곳 음식은 부담이 덜하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3월부터 국립창극단의 수장을 맡고 있다. 1978년부터 3년간 창극단 단원이기도 했던 그는 이곳에 오기 전 결심한 게 하나 있다. 공연 담당 기자들이 창극 공연을 보게 만들겠다는 것. “기자들이 ‘기사는 써도 공연은 안 본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자극을 받았어요. 나부터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죠.”
김 감독이 취임한 뒤 국립창극단은 ‘배비장전’ ‘서편제’ ‘장화홍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 숱한 히트작을 냈다. 한태숙 고선웅 등 연극계의 스타 연출가들을 섭외해 창극을 만든 게 주효했다. 스릴러 창극, 청소년 창극, 18금 창극 등 창극을 특성화해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
“한태숙 연출가가 만든 창극 ‘장화홍련’을 처음 선보였을 때 반향이 컸어요. 당시 창극계에선 이게 창극이냐 연극이냐 논란이 됐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매진 사례로 답해줬죠. 이런 것도 창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창극 관객을 넓히기 위해선 창극이란 줄기를 다양하게 키워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단단한 거목이 돼 창극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체력관리 비법은 뭘까.
“10년 전쯤 제가 몸이 안 좋았어요. 당시 한 팬이 저를 1주일에 한 번 전국의 명산에 데리고 갔어요. 55회나 됐죠. 백두산과 중국 후탸오샤(虎跳峽), 네팔 안나푸르나도 등반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등산하니까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거 있죠.”
그는 지금도 후배 배우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산다. “원로배우도 신인과 경쟁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난 오래됐고 경력 많은 사람이니까 이만큼만 해야지…이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훈아와 남진이 서로 경쟁하며 최고의 스타가 된 것처럼 예술은 경쟁을 통해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만 더 외치다…결국 링거 맞은 사연
이달 초 김성녀 감독은 연극 ‘유리동물원’ 연습 도중 링거를 맞았다. 피로가 누적된 탓이다. 명동예술극장 홍보팀 직원들이 “제발 몸을 생각해서 쉬엄쉬엄하시라”고 해도 “한 번만 더”를 외치는 그다. 명동예술극장 분장실에는 김 감독 전용 간이 침대가 있다. 너무 힘들면 잠시 누웠다 다시 연습한다는 그. 올해 예순넷을 맞은 그의 열정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김성녀 감독의 단골집 벗 모든 메뉴에 조미료 · 고기 안 들어간 담백한 사찰음식
서울 신당동에 있는 카페 ‘벗’은 같은 건물 5층에 있는 향철선원(禪院) 유혜림 원장이 2005년부터 운영하는 식당이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자는 게 운영 방향. 선원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사찰음식을 기반으로 한 메뉴가 주종이다. 모든 메뉴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해산물은 쓴다. 음식에 조미료를 일절 쓰지 않고 멸치 다시마 굴 조개 등 천연 재료로 맛을 낸다.
메뉴는 단출하다. 식사로는 조치발우 카레발우 비빔발우 웰빙제비 팥칼국수 된장칼국수 등 여섯 가지(각 7000원). 여기에 곁들일 만한 음식으로는 해물파전(1만5000원)과 김치전(1만2000원)이 있다. 음식맛은 담백하고 깔끔하다.
술도 판다. 맥주 소주 막걸리는 4000원, 와인은 4만~7만원이다. 오전 11시30분에 문을 열어 오후 10시까지 영업한다. 토요일은 오후 5시까지 운영하고, 일요일은 휴무.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6호선 약수역 방향으로 도보로 10분 걸린다. (02)2254-1053 김인선/송태형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