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집단적 발명’(1934년 작품)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집단적 발명’(1934년 작품)
인어를 비롯해 용, 이무기, 해태 등은 세계 어느 동물원에 가도 볼 수 없는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상상 속 동물들의 생김새를 훤하게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보지도 못한 그러나 ‘아는’ 동물에 대한 믿음이 지나쳐서 ‘보이는 것’보다 ‘아는 것’에 더 비중을 둔다.

[CEO를 위한 미술산책] 본 적 없는 인어인데…상·하반신 다른 그림 불편한 이유는
사람들은 인어를 본 적이 없지만 인어라는 존재를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어는 상반신은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를 지닌 반신반어(半身半魚)다. 게다가 ‘가녀린’ 또는 ‘아름다운’이란 수사는 우리가 자신의 기분이나 마음에 따라 붙여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런 인어를 두고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전설을 만들고, 그것이 동화가 되고, 영화가 되는 소위 ‘원 소스 멀티유저(one source multi-user)’의 전형으로 오늘까지 존재한다. 세상에 없는 인어란 상상의 동물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현실화시킨다. 마치 없는 이야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같은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한없이 증폭되는 것처럼 인어는 현존하는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인어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는 ‘인어는 실존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상상의 동물에 대해 너무나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본 적도 없는 인어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한 것이다. 지금처럼 SNS 같은 매체가 발달했다면 사실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인어는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인어란 인간의 집단적 세뇌 결과물이다. 물론 그 결과 행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만 보는 것’이다. 따라서 모르는 것은 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 이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가져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의문을 가져야 답이 궁금해지는데, 많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은 그냥 지나치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서도 볼 줄 모른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게 된다.

이런 맹목적인 지식 또는 아는 것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 대해 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집단적 발명(Collective Invention)’(1934)이란 그림으로 허를 찌른다. 이 그림은 척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인어’를 드라마틱하게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고 있으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인어는 인어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인어와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어라고 인식했다가 인어라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 ‘불편한 진실’ 때문에 그림을 보다 보면 바로 피곤해진다. 인어는 사실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인어란 확정적인 개념과 형태로 다가온다. 이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집단의 약속 때문이다. 그 약속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저항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집단적 발명’이다.

발명이란 ‘아직까지 없던 기술이나 물건을 새로 생각하여 만들어 내는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화되고 익숙해진다.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어의 존재를 인정한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바뀐 인어에 대해, 없는 것을 상상해 그린 것이라고 진실을 말하면 될 것을, 그렇게 못하고 끙끙 앓은 이유는 뭘까. 그림은 ‘재현’이기 때문이다. 그려진 것은 언제나 실재하는 것, 현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얘기다. 여전히 세상에는 이런 허황된 믿음, 본 적도 없는 선입견으로 인해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냥 보고 마느냐, 아니면 궁금해하면서 보느냐 이것이 문제의 해법이고 그림을 보는 까닭이다.

정준모 <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curatorjj@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