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질병관리본부의 이상한 '예산 털기'
질병관리본부가 연구에 필요도 없는 재료와 시약을 무더기로 사들였다가 보건복지부 감사에 적발됐다. 지난해 연구가 모두 끝났는데도 연구비가 남자 12월에만 총 373개 품목, 3억5300만원어치의 연구용 시약과 재료를 추가로 구입한 게 문제가 됐다. 질병관리본부 측은 “최종연구보고서를 낼 때까지 있을 수 있는 추가 시험에 쓰거나 앞으로 5년간 연구성과를 추적·평가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 산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연구가 종료된 과제에 3억원이 넘는 재료비를 쏟아부었다는 건 남은 연구비를 모두 써버리기 위한 ‘예산 털기’ 차원이라는 의혹을 받을 수 있다. 해당 연도 연구비가 남으면 다음해 연구비 예산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필요 없는 곳에라도 일단 지출해놓고 보는 공공기관들의 오랜 악습이다.

실제 질병관리본부 A과는 지난해 내부연구과제에서 활용하고 남은 ‘모기유인채집기’ 20개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671만1800원을 들여 11개를 더 샀다. 구입 시점은 연구과제가 끝나 전혀 사용할 수 없었던 12월19일이었다. 이렇게 지난해 말(11~12월) 두 달간 사들인 재료 및 시약 비용은 2013년 전체 예산 집행 액수의 36%나 됐다. 복지부 감사 담당자는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난을 사더라도 이미 확보한 연구비 예산을 지키려는 구매관행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예산 털기’는 질병관리본부에만 국한된 상황은 아니다. 연말 남은 예산을 소진하기 위해 아무 문제가 없는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것은 수십년째 이어온 지방자치단체들의 고질병이다. 중앙정부도 다르진 않다. 외교부의 2012년 예산 중 다른 사업으로 전용된 예산의 86%는 연말(10~12월)에 집중됐다.

기획재정부 예산낭비신고콜센터(1577-1242)로 걸려오는 신고내용 중 상당수(40%)는 “왜 겨울철만 되면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치우냐”는 식의 연말 예산 몰아쓰기에 대한 지적이라고 한다. 기재부는 내년도 부처별 예산을 결정할 때 이 같은 적폐를 걸러낼 수 있는 심사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고은이 경제부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