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이제 막 재활치료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버지는 당장 퇴원하겠다고 우긴다. 딸은 아버지에게 2주만 더 치료받으면 완전히 회복할 수 있으니 치료를 더 받고 퇴원하자고 부탁하지만 막무가내다. 딸은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하다. 당신을 위해 치료를 하자는 것인데 왜 내 맘을 몰라주는 걸까.

협상을 하다 보면 위 이야기처럼 내 맘을 몰라주는 상대방 때문에 애태우는 경우가 많다. 내 말대로 하면 더 좋은 결과가 보이는데도 상대방은 자기 요구사항만을 주장한다. 대부분 요구사항은 터무니없이 자기 잇속만 챙기는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자고 해도 상대방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럴 때 대부분 사람은 상대방에게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들어주겠느냐고 묻는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을 제공하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무엇은 내가 양보할 수 없는, 양보해서도 안 되는 것일 경우가 많다. 풀기는커녕 아예 풀 수 없는 문제가 돼 버린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

하버드대의 디팩 맬호트라와 맥스 베이저만 교수는 저서 ‘협상천재’에서 ‘무엇’을 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왜’냐고 물으라고 말한다. 그 예로 미국 기업이 유럽의 소규모 기업으로부터 새로운 보건제품 원료를 구입하는 협상을 들고 있다. 양측은 파운드당 18달러의 가격으로 연간 100만파운드의 원료를 거래하기로 합의했지만 독점 조항을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졌다. 유럽의 공급업체는 그 미국 기업에 독점적으로 원료를 판매하는 조항에 동의하지 않으려 했다. 구매자 측인 미국 기업은 경쟁 업체들이 핵심 원료를 확보할수 있는 상황에서는 신제품 생산에 투자할 용의가 없었다. 이 독점권은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미국 기업은 유럽의 소기업이 연간 매출과 이익을 원할 것이라고 예상, 최소 주문량을 보장해주고 가격도 올려주는 등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유럽 회사는 독점권을 제공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유럽에서 협상하던 미국 협상팀은 결국 본사의 협상전문가를 초청했다. 협상전문가는 양측의 입장을 들어본 뒤 문제를 단숨에 풀었다. 그 전문가가 던진 결정적 한마디는 ‘왜’였다. 왜 독점권을 제공하지 못 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공급업체의 답변은 예상밖이었다. 당시 유럽 기업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서 자신의 사촌에게 250파운드의 원료를 판매하는 계약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기업에 독점권을 제공하면 사촌과의 기존 계약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점이 문제였던 것. 문제를 파악한 후 계약은 쉽게 진행됐다. 사촌에게 연간 200~300파운드의 원료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미국 기업에 독점권을 제공한다는 조항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2000년 10월 미국의 유엔 분담금 축소를 유엔 가입국들과 협의한 유엔 주재 미국 대사였던 리처드 홀브룩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당시 미국은 유엔 예산의 25%에 달하는 분담금을 부담하면서 몇 년 동안 10억달러가 넘는 막대한 돈을 내지 못해 채무가 생긴 상태였다. 앞으로도 계속 유엔 예산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미국은 분담금을 줄이고 싶었다. 그래서 10억달러를 내는 대신 분담금을 줄여달라고 다른 나라들에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문제는 다른 나라들이 이미 발생한 채무를 무기로 분담금 축소를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점이었다.

홀브룩 대사는 다른 나라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분담금을 늘릴 용의가 없다고 말하는 나라의 대사들에게 일일이 왜 그런지 확인했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얼마 안 가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드러났다. 2001년 회계예산이 이미 정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2001년 1월1일 이전에 분담금을 조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홀브룩 대사는 바로 해결책을 찾았다. 미국의 분담금을 25%에서 22%로 낮추는 대신 다른 유엔 회원국들에는 2002년까지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제안이었다. 어려웠던 국제협상이 ‘왜’라는 질문으로 한 방에 해결된 순간이었다.

이계평 < 세계경영연구원(IGM)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