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수염
3년 전 미국에서 수염을 깨끗하게 기른 인물들만 가입할 수 있는 정치단체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부터 미국 대통령들이 수염을 기르지 않고 있다면서 링컨이나 태프트처럼 수염 기른 대통령을 만들어보자는 사업목표를 내걸었다. 수염을 제멋대로 기르는 사람은 사절했다. 하지만 이들 단체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독립 주역들이 수염을 기르지 않은 점을 간과했나 보다.

수염은 남성의 성적 상징물이다. 수염 모낭에서 성적 유인역할을 하는 분비물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윈은 성적 선택(sexual selection)이 수염을 진화시켰다는 가설을 세웠다. 진화심리학자들도 이 가설을 받아들인다. 미국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고 난 뒤 더 남자다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여성들이 수염 기른 남자들을 더욱 선호한다는 보고도 많다.

대부분 종교에선 수염을 신이 내린 상징물로 여긴다. 함부로 손을 대면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이슬람교 시크교 힌두교 그리스정교 유대교 등에서는 모두 수염을 기른다. 이슬람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선 수염 기르는 것을 아예 법으로 명문화하고 있다. 유대인들도 수염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위로 잘라선 안된다는 관습을 고수하고 있다.

수염의 길이는 위정자의 능력과 권위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고대 이집트에선 오직 파라오만 길게 기를 수 있었다. 로마시대도 수염은 권력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일반인들은 함부로 기를 수 없었다. 동양 역시 수염은 힘의 상징이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선 수염이 화면의 절반을 채우기도 한다.

수염은 사회 저항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 때부터는 혁명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당시 노동자들은 선거권을 달라며 거리에서 싸움을 벌이면서 다듬지 않은 턱수염을 과시했다. 마르크스가 더부룩한 수염을 자랑할 때 좌파 세력에선 이를 민주주의 수염이라고 표현했다.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의 수염은 바로 이런 반항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히틀러나 스탈린, 후세인의 콧수염은 독재와 광기의 아이콘이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4개월간 기르던 수염을 말끔히 깎고 그제 정상 출근했다고 한다. 그가 기른 수염은 물론 권위의 상징도, 반항의 징표도 아니었다. 그저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했던 수염이다. 세월호 갈등도 말끔히 해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