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말의 품격, 욕의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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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그악스런 세상이다. 대통령에게까지 욕설을 퍼부은 사람이나, 그런 그를 욕하는 사람들이나. 입에 담기도, 글로 옮기기도 거북하다. 연휴를 쉬면서도 영 언짢은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게 욕이다.
몇 해 전 욕에 중독된 10대를 다룬 TV 프로그램이 관심을 모았다. 여고생 네 명이 45분간 대화하는 것을 관찰한 실험 결과 이들은 248번이나 욕을 했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졸라’ ‘18’을 입에 달고 산다고 다들 개탄했다. 하지만 아이들 탓할 일만도 아니다. 어른들도 그 나이 땐 수시로 욕을 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문제작이 된 이유다. 멀쩡한 신사도 운전대만 잡으면 돌변하지 않는가. 그 흔한 조폭 영화, 막장 드라마도 욕설과 막말을 빼면 뭐가 남을지 의문이다.
만인이 만인을 욕하는 세상
저잣거리 욕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얼굴을 맞대야 가능한 것이, 정보화 덕(?)에 만인이 만인에게 욕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 포털이나 트위터 페이스북에는 시시각각 욕설과 막말이 넘쳐난다. 욕설 차단조치를 취해도 ‘새퀴, 색휘, 새ㅣ끼’ 식으로 살짝 바꾸면 그만이다. 스마트폰 등장으로 언제 어디서나 무한 업로드가 가능한 욕설의 유비쿼터스 시대가 열렸다.
욕이란 게 뜻을 알고 나면 더욱 거북해진다. 작가 성석제의 표현대로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인간의 어떤 신체기관을 닮았는지, 어떤 짐승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흔한 욕이 ‘말과 사슴을 구분 못하는 바보(바카야로·馬鹿野)’다. 그에 비해 우리말 욕은 다양하고 풍성하다. 여고생 실험에 등장한 욕설만도 15종이나 됐다.
하면 할수록 느는 게 욕이다. 김영오 씨의 욕설·막말 동영상에 많은 이들이 경악한 것은 욕설 상대 탓만이 아니었다. 어쩌다 홧김에 나온 게 아니라 욕설이 일상이자 체화된 수준으로 비쳐진 탓이다. 하지만 그를 욕하는 이들의 언어 수준도 오십보백보다. 모두가 욕한다고 해서 자신이 내뱉은 욕설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4류 정치가 만든 서글픈 자화상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욕설의 일상화다. 무엇보다 4류 정치의 공로(?)가 절대적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질타한 지 20년이 흘렀건만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이명박 정부 때 해머와 최루탄이던 저질 국회의 상징이 박근혜 정부에선 욕설과 막말로 치환됐을 뿐이다. 여성 대통령을 ‘년’이라고 지칭하고도 되레 으쓱하는 나라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욕설이 넘쳐나는 것은 그만큼 명예나 모욕에 둔감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말의 품격은 잘 듣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본 적이 없으니 말문이 막히면 대뜸 욕설부터 내뱉는다. 목소리 큰 게 장땡이라는 데시벨 원칙이 지배하는 한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할 리도 만무하다. 오죽하면 국회의원 막말 금지법이 발의됐을까 싶다. 국민의 대표란 선량들이 법으로 금하지 않으면 스스로 품위를 지킬 줄 모른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 저질 정치가 나꼼수와 일베의 욕설 잔치를 만들어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욕설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도 살해한다. 본인이 뱉어낸 시궁창 언어를 한 번 녹음해 놓고 들어보라. 그러고도 표현의 자유 운운할 수 있는지. 중국 고전 ‘태평어람’에 질병은 입을 좇아 들어가고, 화근은 입을 좇아 나온다고 했다. 말이 곧 문화 수준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몇 해 전 욕에 중독된 10대를 다룬 TV 프로그램이 관심을 모았다. 여고생 네 명이 45분간 대화하는 것을 관찰한 실험 결과 이들은 248번이나 욕을 했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졸라’ ‘18’을 입에 달고 산다고 다들 개탄했다. 하지만 아이들 탓할 일만도 아니다. 어른들도 그 나이 땐 수시로 욕을 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문제작이 된 이유다. 멀쩡한 신사도 운전대만 잡으면 돌변하지 않는가. 그 흔한 조폭 영화, 막장 드라마도 욕설과 막말을 빼면 뭐가 남을지 의문이다.
만인이 만인을 욕하는 세상
저잣거리 욕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얼굴을 맞대야 가능한 것이, 정보화 덕(?)에 만인이 만인에게 욕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 포털이나 트위터 페이스북에는 시시각각 욕설과 막말이 넘쳐난다. 욕설 차단조치를 취해도 ‘새퀴, 색휘, 새ㅣ끼’ 식으로 살짝 바꾸면 그만이다. 스마트폰 등장으로 언제 어디서나 무한 업로드가 가능한 욕설의 유비쿼터스 시대가 열렸다.
욕이란 게 뜻을 알고 나면 더욱 거북해진다. 작가 성석제의 표현대로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인간의 어떤 신체기관을 닮았는지, 어떤 짐승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흔한 욕이 ‘말과 사슴을 구분 못하는 바보(바카야로·馬鹿野)’다. 그에 비해 우리말 욕은 다양하고 풍성하다. 여고생 실험에 등장한 욕설만도 15종이나 됐다.
하면 할수록 느는 게 욕이다. 김영오 씨의 욕설·막말 동영상에 많은 이들이 경악한 것은 욕설 상대 탓만이 아니었다. 어쩌다 홧김에 나온 게 아니라 욕설이 일상이자 체화된 수준으로 비쳐진 탓이다. 하지만 그를 욕하는 이들의 언어 수준도 오십보백보다. 모두가 욕한다고 해서 자신이 내뱉은 욕설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4류 정치가 만든 서글픈 자화상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욕설의 일상화다. 무엇보다 4류 정치의 공로(?)가 절대적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질타한 지 20년이 흘렀건만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이명박 정부 때 해머와 최루탄이던 저질 국회의 상징이 박근혜 정부에선 욕설과 막말로 치환됐을 뿐이다. 여성 대통령을 ‘년’이라고 지칭하고도 되레 으쓱하는 나라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욕설이 넘쳐나는 것은 그만큼 명예나 모욕에 둔감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말의 품격은 잘 듣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본 적이 없으니 말문이 막히면 대뜸 욕설부터 내뱉는다. 목소리 큰 게 장땡이라는 데시벨 원칙이 지배하는 한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할 리도 만무하다. 오죽하면 국회의원 막말 금지법이 발의됐을까 싶다. 국민의 대표란 선량들이 법으로 금하지 않으면 스스로 품위를 지킬 줄 모른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 저질 정치가 나꼼수와 일베의 욕설 잔치를 만들어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욕설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도 살해한다. 본인이 뱉어낸 시궁창 언어를 한 번 녹음해 놓고 들어보라. 그러고도 표현의 자유 운운할 수 있는지. 중국 고전 ‘태평어람’에 질병은 입을 좇아 들어가고, 화근은 입을 좇아 나온다고 했다. 말이 곧 문화 수준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