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노예' 친일파의 말로…짜릿한 속도·리듬감…해학적 재미도 쏠쏠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일제 강점기에 징용군으로 끌려가 생사를 모르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살아 돌아왔는데도 아버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아니 ‘에~또~귀찮게시리 왜 왔느냐’는 표정이다. 생환 시점이 공교롭기는 하다. 아버지는 일제와 미군정 치하에서 약삭빠른 처세와 온갖 권모술수로 쌓아올린 재산을 지키기 위한 ‘거짓 자살극’을 한창 벌이던 참이다. 사위의 ‘배신’으로 모든 재산을 날릴 상황에 처하자 관 속에서 뛰쳐나온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위 놈이 이럴 수 있느냐, 난 어쩌면 좋으냐”고 묻는다. 아들은 “내 아버지 맞느냐”며 냉담하다. “아버지, 그 구차스러운 수의를 벗으십시오. 창피하지 않으세요?”

아버지는 ‘맹진사댁 경사’ ‘한네의 승천’의 극작가 오영진(1916~1974)이 악질적 친일파의 전형이자 물욕의 화신으로 그려낸 ‘이중생’이다. 65년 전 쓰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리고 수학능력시험 지문에 종종 등장하는 희곡이 ‘지금 여기의 모습이 담긴 동시대 연극’으로 되살아났다. 국립극단 제작, 김광보 연출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다.

무대는 사실주의적인 원작에 충실하다. 연출가는 “몇몇 고어를 뺀 것 말고는 토씨 하나 바꾸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알아듣기 어렵지 않다. 김광보 특유의 속도감으로 극이 빠르게 흘러가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구어체 대사의 리듬감을 배우들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호흡과 속도 조절로 맛깔나게 살려내서다. 원작의 해학적 재미도 배가된다.

주역부터 단역까지 배우들의 개성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극 중 배역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물질주의와 탐욕에 물든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인간상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이중생’을 연기하는 정진각은 ‘대체불가’란 생각이 들 만큼 명연을 펼친다. 영정 뒤 뒷뜰로 사라지는 그의 쓸쓸한 표정과 몸짓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때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졸작으로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하는 국립극단의 존재 의의를 입증하는 완성도 높은 무대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김우진의 ‘이영녀’, 유치진의 ‘토막’, 김영수의 ‘혈맥’ 등으로 이어지는 국립극단의 ‘한국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에 기대를 갖게 한다. 오는 28일까지, 2만~5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