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3000년전 詩보다 빈약한 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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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증권부 차장 kimdw@hankyung.com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는 영웅 아킬레스가 사용한 방패에 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온다. ‘일리아스’ 18권 478행부터 608행까지가 방패에 관한 설명이다. 200자 원고지 38장 분량이다. 호메로스가 눈앞의 물건을 설명하듯 방패의 형상을 그린 덕에 후대 예술가들은 마치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재림한 것처럼 실물 방패를 만들 수 있었다. 19세기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극장의 벽화를 담당했던 안젤로 몬티첼리도 ‘아킬레스의 방패’ 재현품을 만든 인물 중 한 명이다.
3000년 전 쓰여진 문학작품 속 묘사만을 근거로 근현대의 여러 작가들이 저마다 형태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실물 방패를 제조해낸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모두 방패에 관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고 상세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구체적 정보…실상파악의 기반
오늘날은 호메로스가 살던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모든 것이 구체적인 시대다. 아날로그의 애매함이 사라진 대신 시비가 분명한 디지털 정보가 온라인을 통해 빛의 속도로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증권시장은 ‘현대성’이 가장 높은 밀도로 집적된 공간이다. 문학 표현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정밀한 숫자로 무장한 회계·통계·경영·주가 관련 정보가 넘쳐난다.
증시에 등장하는 여러 정보 중에서도 기업이 직접 발표하는 각종 공시와 사업보고서, 분·반기 보고서는 기업의 실상에 관한 정보를 투명하게 투자자에게 전달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가장 정확하고, 추론과 오류의 여지를 가장 적게 남긴 든든한 판단 근거라는 얘기다. 그렇기에 투자자들은 여기에 담긴 기록을 믿고, 기업의 상태를 파악해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문제는 이런 공식정보를 토대로 하더라도 기업의 참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도 투자자의 관심이 뜸해지는 추석연휴를 앞두고 연례행사처럼 ‘올빼미공시’ ‘늑장공시’가 반복됐다. 유상증자 결정이나 수주 협상 결렬, 벌금부과 소식 등이 뒤늦게 전해졌다.
흔들리는 신뢰기반 방치 안돼
심지어 사업보고서에서 한 분기 정도가 아니라 5년간의 실적이 모조리 정정되는 일까지 터졌다. 국내 시공능력평가 24위 건설업체 한신공영은 최근 정정공시를 통해 최근 4개 사업연도에 흑자가 아닌 적자를 봤다고 발표했다. 57억원 흑자가 184억원 적자(2010년)로 고쳐지는 황당한 일이 생겼다. 새로 외부감사인이 된 삼일회계법인이 이전 감사인(한영회계법인)보다 훨씬 보수적인 회계처리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이라지만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결과다.
공시의 정확성은 공시를 발표한 회사에 대한 믿음일 뿐 아니라 증시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게 지탱하는 큰 기둥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일부 상장사들이 잘못된 내용을 버젓이 기재하거나 한참 뒤에 은근슬쩍 고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감독당국도 당장 큰 문제가 불거지지 않으면 솜방망이 처벌로 적당히 넘어간 게 사실이다.
모든 사업보고서와 분기보고서 앞에는 ‘대표이사 등의 확인과 서명’이 있다. ‘당사의 대표이사로서 공시서류의 기재 내용을 주의를 다해 직접 확인·검토한 결과 중요한 사항의 기재나 표시에서 누락이나 허위가 없다’는 문구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상장사 대표이사 확인서명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3000년 전 문학작품보다도 정보 전달을 못하는 공시가 반복돼선 안될 것이다.
김동욱 증권부 차장 kimdw@hankyung.com
3000년 전 쓰여진 문학작품 속 묘사만을 근거로 근현대의 여러 작가들이 저마다 형태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실물 방패를 제조해낸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모두 방패에 관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고 상세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구체적 정보…실상파악의 기반
오늘날은 호메로스가 살던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모든 것이 구체적인 시대다. 아날로그의 애매함이 사라진 대신 시비가 분명한 디지털 정보가 온라인을 통해 빛의 속도로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증권시장은 ‘현대성’이 가장 높은 밀도로 집적된 공간이다. 문학 표현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정밀한 숫자로 무장한 회계·통계·경영·주가 관련 정보가 넘쳐난다.
증시에 등장하는 여러 정보 중에서도 기업이 직접 발표하는 각종 공시와 사업보고서, 분·반기 보고서는 기업의 실상에 관한 정보를 투명하게 투자자에게 전달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가장 정확하고, 추론과 오류의 여지를 가장 적게 남긴 든든한 판단 근거라는 얘기다. 그렇기에 투자자들은 여기에 담긴 기록을 믿고, 기업의 상태를 파악해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문제는 이런 공식정보를 토대로 하더라도 기업의 참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도 투자자의 관심이 뜸해지는 추석연휴를 앞두고 연례행사처럼 ‘올빼미공시’ ‘늑장공시’가 반복됐다. 유상증자 결정이나 수주 협상 결렬, 벌금부과 소식 등이 뒤늦게 전해졌다.
흔들리는 신뢰기반 방치 안돼
심지어 사업보고서에서 한 분기 정도가 아니라 5년간의 실적이 모조리 정정되는 일까지 터졌다. 국내 시공능력평가 24위 건설업체 한신공영은 최근 정정공시를 통해 최근 4개 사업연도에 흑자가 아닌 적자를 봤다고 발표했다. 57억원 흑자가 184억원 적자(2010년)로 고쳐지는 황당한 일이 생겼다. 새로 외부감사인이 된 삼일회계법인이 이전 감사인(한영회계법인)보다 훨씬 보수적인 회계처리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이라지만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결과다.
공시의 정확성은 공시를 발표한 회사에 대한 믿음일 뿐 아니라 증시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게 지탱하는 큰 기둥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일부 상장사들이 잘못된 내용을 버젓이 기재하거나 한참 뒤에 은근슬쩍 고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감독당국도 당장 큰 문제가 불거지지 않으면 솜방망이 처벌로 적당히 넘어간 게 사실이다.
모든 사업보고서와 분기보고서 앞에는 ‘대표이사 등의 확인과 서명’이 있다. ‘당사의 대표이사로서 공시서류의 기재 내용을 주의를 다해 직접 확인·검토한 결과 중요한 사항의 기재나 표시에서 누락이나 허위가 없다’는 문구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상장사 대표이사 확인서명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3000년 전 문학작품보다도 정보 전달을 못하는 공시가 반복돼선 안될 것이다.
김동욱 증권부 차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