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늦은 근무 덕에 목숨 건졌죠
경북대를 졸업한 이씨는 1990년 학사장교 여군 35기로 임관했다. 그는 “육군 장교였던 사촌오빠가 멋있어 보였고 직업 군인에게 여러 가지 혜택이 많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11월 아이티의 PKO부대인 미누스타(유엔 아이티 안정화 임무단)에 유일한 한국군 장교(군수 담당)로 파견됐다. 2003년 4월부터 반 년간 같은 임무로 일했던 동티모르 상록수부대에 이어 두 번째 PKO 활동이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꼼꼼한 업무처리 방식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아이티에 파견된 지 두 달 만에 대지진이 터졌다. 피해가 큰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군수기지에서 늦게까지 근무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원래는 숙소에 있을 시간인데 그날은 인수인계 때문에 공항 근처 기지에 있었어요. 숙소는 흔적도 없이 내려앉았고요. 공항 활주로가 쪼개져 널브러져서…. 상상 안 되시죠. 전 아직 생생한데.” 현지 동료들의 사망 소식이 속속 들려왔고 부대 사령부 건물에서 일하던 미누스타 총책임자(사무총장 특사)까지 사망했다. 모두가 넋이 나간 상황, 그러나 이씨(당시 소령)는 한국 합동참모본부에 실상을 정확히 보고하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제가 겁이 별로 없고 아주 단순하게 살거든요. 복잡하게 생각을 못 해요.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만 생각했어요.”
그는 외교부, 도미니크공화국 등과 긴밀히 협력해 지진 발생 다음달인 2월 단비부대가 아이티로 파견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진 발생 후 3개월간은 인명 구조를 도왔고 이후 2010년 11월 귀국하기 전까지는 본연의 업무인 물자 공급에 주력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귀국 한 달여 만에 중령으로 진급했다. 2011년 7월 육군종합군수학교 교관을 끝으로 전역했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너무 힘들어해서요. 예전엔 떨어져 있어도 별말 없었는데…대학 입시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보살펴주려고요.” 2012년에는 영어실력을 무기로 서울핵안보정상회의 의전관을 맡아 4대 국제기구인 인터폴 사무총장을 수행했다. 현재는 국방FM ‘우리는 대한국군’ 프로그램에서 ‘지금은 여군시대’ 리포터로 활동 중이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