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DVERTISEMENT

    [정규재 칼럼] 한국 민주주의 디폴트 상태다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정치중독이 뻔뻔한 한국인 양산
    후쿠야마 '역사의 종언'은 오류로
    피케티 열풍도 약탈적 욕구 불과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정규재 칼럼] 한국 민주주의 디폴트 상태다
    서구 사회가 민주체제로 전환한 것도 불과 100년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에야 그것의 부산물로서 패전국가들이 민주화됐다. 당시 민주체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는 구시대의 상징이었고 터키 그리스 독일은 전쟁을 거치면서 왕정이 폐지됐다. 그렇게 자유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회주의 망령은 국민국가 속에서 더욱 강력하게 되살아났다. 극우를 전쟁사회주의라고 부른다면 20세기는 사회주의 전성기였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국가는 사회주의를 만들어냈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리니즘은 모두 20세기 사회주의 질병이다. ‘악한 그들’과 ‘선한 인민’으로 양분된 사회에서 선한 인민을 대리하는 지도자들이 출현했고, 국민이 박수갈채를 보내면 독재국가가 태어난다. 1, 2차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국가들의 총력전은 국민이 주권자가 됐을 때 나타난 결과였다. 이것이 20세기다.

    민주주의를 악으로 묘사하는 것이냐고? 그렇다. 민주주의는 부덕과 악덕, 게으름과 책임 전가, 심지어 타인 재산에 대한 약탈과 몰수를 부추긴다. 법인세와 소득세에 대한, 다시 말해 타인의 것에 대한 대중의 타오르는 약탈적 욕구를 생각해보라. 아니 90%의 몰수적 소득세를 주장하는 피케티를 환영하는 한국을 보라. 10대들이 뭔가 나쁜 일을 당했다는 뜻으로 “민주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대중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정당화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복지 논리도 그렇다. 오늘의 소비를 내일로 미뤄두는 절제와 인내가 문명의 본질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이런 문명적 특성을 여지없이 공격한다. 미래를 할인해 오늘 소비하는 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경쟁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그것에 복지국가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복지국가는 치명적 현대병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아시아에도 민주정치가 이식됐다. 그러나 벌써 죽고 말았다. 북한이 독재로 치달아간 것은 민주주의의 태생과 운명을 잘 보여준다. 문화혁명도 킬링필드도 뿌리는 같다. 민주주의에 내재한 악의 본능이다. 옛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후쿠야마는 역사(사회주의)는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틀렸다. 사회주의는 죽지 않았다.

    한국이 산업화혁명에 이어 민주화 시민혁명을 완수했다고 선언하던 1987년 체제는 27년 만에 부도 상태다. 가장 평화롭게 국가적 의사결정을 만들어 내는 체제라고 우리는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러나 정치라는 이름을 빌려 도덕적 파탄을 정당화하는 체제에 불과하다는 진실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가 확인한 것은 민주주의는 국민을 타락시킨다는 사실이다. 정치라는 간판만 달면 불법도 억지도 심지어 거짓말도 정당화된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은 보험사기도, 아파트 난방비 도둑질도 집단이기만 하면 양심의 가책 없이 감행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인이 이렇게 뻔뻔해진 것은 민주주의 때문일 것이다.

    정치는 아직 1987년의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 아니 길거리를 전전하고 싸우고 확성기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책상을 뒤엎고 멱살을 잡는 것을 정치라고 생각하는 건달들이 정치를 점령하고 있다. 수십일을 단식해도 한국인은 전혀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특이체질이라는 것도 입증됐다. 극단적으로 투쟁할수록 이긴다는 게임 규칙은 살아 있다. 그리고 피해자이기만 하면 그 어떤 월권적 요구도 정당화된다. 단체들은 자신들의 대표로 얼굴에 철판을 깐 비정상적 인간들을 선출한다. 대학도 의사도 변호사도 언론도 단체대표는 그런 저질로 채워진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죽어버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민주주의를 말할 때 민주주의는 인민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명박 정부가 동반성장,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내걸면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외피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회주의는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민주주의다. 국민은 정치에 중독돼 있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ADVERTISEMENT

    1. 1

      [한경에세이] 의사의 언어

      “치료 기간은 얼마나 될까요?”, “얼마나 지나야 회복할 수 있을까요?”, “10년 생존율은 얼마나 되나요?”진료실에서 이런 질문이 반복된다. 환자와 가족은 대개 ‘얼마나’를 묻는다.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가늠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 숫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하게 하고, 판단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결정을 돕는다.하지만 의사는 숫자를 쉽게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기 쉽지 않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의사들은 숫자로 말하는 데 부담을 느낀다. 숫자는 예측처럼 들리고, 예측은 곧 약속처럼 받아들여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는 숫자 대신 방향성을 담은 표현을 택한다. “현재로서는 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같은.앞날을 대비하려는 환자는 불확실성을 줄이고 싶어 하고, 예외의 가능성을 아는 의사는 단정보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어 한다. 진료실에서 환자는 숫자를 통해 미래를 붙잡으려 하고, 의사는 그 숫자를 쉽게 내놓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대화는 어긋난다. 확률이나 숫자로만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해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단일한 수치보다는 범위를 제시하는 편이다. 예컨대 40~60%, 혹은 3~6개월이라는 표현은 결과의 가능성을 열어둔다.확률이나 범위보다 ‘빈도’가 사람들의 기억에 더 잘 남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0명 중 3~4명에서 이런 부작용이 생깁니다”, “10명 중 7~8명이 이에 해당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방법이 환자의 판단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라 보기 때문이다. 확률은 계산되지만, 빈도는 떠올려진다. ‘10

    2. 2

      [이응준의 시선] 인간 안의 노예제도

      흑인인권운동가 맬컴X의 자서전 <맬컴X>(1965)의 집필자 알렉스 헤일리는 1976년 장편소설 <뿌리>를 출간한다. 1767년 감비아에서 납치돼 미국에 노예로 끌려온 흑인 쿤타킨테와 그 가계(家系)의 고난을 그린 대작으로서 작가의 외가 쪽 이야기가 바탕이다.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이 네덜란드 선박에 실려 영국 식민지이던 미국 땅에 처음 도착한 건 1619년 버지니아 해변이었다. 그로부터 250년 가까이가 흐른 1865년 12월 18일이 돼서야 수정헌법 제13조의 비준 완료가 선포돼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 폐지가 효력을 발휘했다.노예제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최악의 악’일진대, 이 죄악을 둘러싼 의외의 사실들을 숙고해보는 것은 인간의 어두운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일과 같다. 일단, 흑인 노예제에 관해 우리는 백인들만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간 사냥’을 벌인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의 민낯은 복잡하다. 아프리카의 여러 왕국들과 부족들은 전쟁과 약탈로 포획한 다른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고, 그들을 해안으로 끌고 가 유럽 상인들에게 팔았다. 흑인 중간노예상들은 대서양 노예무역의 핵심 축이었다.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라는 국가 노예계급에 생산을 전담시켰고, 로마 제국은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노예들의 노동력 위에 세워졌다. 이슬람 제국 또한 8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동아프리카에서 수천만 명의 흑인을 잡아온 ‘사하라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몽골 제국, 중국 왕조들은 물론 노예제도는 인종, 문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인류사에 존재했다. 조선은 동족을 가장 악독하게 노예로 부린 국가였다. ‘일천즉천(一賤則賤)’의

    3. 3

      [차장 칼럼] 청약 시장과 그 적들

      “저희가 부부가 아닌 게 더 유리한가요? 내 집 마련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못 하겠습니까.”인기 드라마 ‘모범택시’ 시즌2(2023년)에서 불법 청약 사건 해결을 위해 신혼부부로 위장한 주인공 김도기(이제훈 분)의 말이다. 청약 가점을 높이기 위해 아이를 허위로 입양하고, 위장 출산도 서슴지 않는 장면으로 화제가 됐다. 드라마 속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법 청약 브로커가 무주택자의 허위 입양 신고를 도운 뒤 다자녀가구로 꾸며 특별공급을 받도록 했다. 이후 아이 파양까지 도왔다.최근 불법 청약 수법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부모와 함께 단독주택에서 거주하던 한 남매는 부모 소유의 창고 건물 두 동에 각각 거짓으로 전입 신고했다. 이후 남매 모두 무주택 가구 구성원 자격을 얻었고, 둘 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 천태만상의 '불법 청약'위장 전입·결혼 같은 수법은 고전적이다. 때로는 집을 소유한 남편과 이혼한 것처럼 꾸며 자신의 무주택 기간을 늘리는 ‘위장 이혼’까지 불사한다. 청약에 당첨되기 위해 부양가족을 허위로 부풀리고, 실거주하지 않는 곳에 주소지만 옮겨두는 행위도 다반사다.부정 청약은 단순한 도덕적 해이를 넘어 실수요자의 소중한 당첨 기회를 가로채는 ‘약탈’과 다름없다. 수백 대 1의 경쟁률 속에 누군가의 부정한 당첨은 법을 지키며 차례를 기다려온 서민의 꿈을 짓밟는 행위다.더욱 참담한 것은 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할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이 부정 청약 논란의 중심에 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최근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은 국민에게 깊은 허탈감마저 줬다. 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