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사내유보금을 투자로 유도하려면
대기업들이 유보 이윤을 천문학적 규모의 현금으로 보유한 채 투자를 기피한다면 경기는 활력을 잃는다. 꽤 오래 침체 중인 경제를 살리려면 기업 내 자금이 외부로 풀려나는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경기부양책을 다각적으로 추진하는 정부는 기업소득환류세를 시행해 어느 규모 이상의 사내유보금에 대해 징벌성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배당이나 투자를 강제할 모양이다.

주주에게 배당하든가, 종업원들에게 임금으로 지불하든가, 아니면 투자를 늘리든가 하는 등의 방식으로 사내유보금을 방출하지 않으면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돈이 돌도록 만들어 경기를 부양해보자는 고육지책이겠으나 투자 실패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정부가 배당이나 투자 확대를 의무화한다면 난센스다.

왜 기업들은 막대한 투자 수익을 포기하면서까지 현금을 쌓아둘까? 지금은 전환기다.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갈린다. 차세대 먹거리를 찾아 기업들은 혈안이 돼 있고 유보금은 곧 들이닥칠 전환기를 대비하려는 수단이다. 아무리 단기적 경기부양이 시급하더라도 아직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기업들에 무조건 투자하라고 강요할 일이 아니다.

고도성장기에 대기업들은 생산설비 확장 경쟁에 몰입해 왔다. 이윤을 유보할 겨를도 없이 방대한 규모의 차입으로 투자자금을 조달했다. 대기업 평균 부채비율은 400% 수준이었는데 무역수지가 기록적 적자를 기록하면서 들이닥친 최악의 사태가 소위 외환위기였다. 수출 부진으로 과잉설비의 부담이 현실화하자 높은 부채비율은 순식간에 수많은 기업들을 도산시켜 버렸다.

환란(換亂)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은 부채비율을 낮추고 더 많은 현금을 보유하기 시작했다. 한국 기업들이 2008년 경제위기를 그런대로 잘 겪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업소득환류세는 기업에 건전한 재무구조를 뒷받침하는 유동성자산을 줄이라고 압박한다.

물론 현재 우리 대기업들이 재무구조 건전성만을 위해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투자를 하고 싶어도 마땅한 투자처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외부자금을 빌려서 부채비율이 400%에 이르도록 투자하던 우리 기업들이 이제는 현금을 쌓아두고도 투자를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지금 이런 기업들에 묻지마 투자를 강제하려고 한다.

과거 고도성장 시기의 투자는 선진국 상품을 국산화하는 투자였다. 국산화는 결국 모방생산인데 그 수익성은 저임금을 이용한 저가격 전략으로 보장됐기 때문에 기업들은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선진국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고 임금도 이미 저임금이 아니다. 우리 기업들도 선진국 기업들처럼 세계적 신상품을 개발해 생산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지금 시행해야 하는 투자의 성격은 과거 따라잡기 시대의 투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는 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까닭은 돈 되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들은 연구개발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돈 될 일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런데 창조적 신상품은 기업이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곧바로 투자로 이어지지 못한다. 현존의 산업활동을 관리하는 기존의 물리적 인프라와 사회경제적 제도 및 관행이 신상품 등장에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인정보보호가 빅데이터산업을 막고 산림보호가 풍력발전을 막는다.

신상품이 창조적일수록 그 패러다임은 기존의 인프라와 제도에 맞지 않기 쉽다. 그리고 현 산업활동의 기득권층은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면서 신상품 등장을 조직적으로 방해한다. 정부는 무조건 투자하라고 윽박지를 일이 아니다. 메가트렌드와 신성장산업의 동향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선제적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규제와 관행을 시정해 걸림돌을 들어내면 기업들은 스스로 투자할 것이다. 등 떠밀린 기업이 투자랍시고 벌인 사업이 실패하는 일이 빈발하면 오히려 국가 경제에 부담만 더 키운다.

이승훈 < 서울대 경제학 명예교수 shoonlee@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