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퇴직자들은 기금형 퇴직연금에 자유롭게 가입해 비교적 풍족한 연금생활을 누리고 있다. 시드니 직장인들이 금융회사가 밀집한 마틴플레이스광장 인근에서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호주의 퇴직자들은 기금형 퇴직연금에 자유롭게 가입해 비교적 풍족한 연금생활을 누리고 있다. 시드니 직장인들이 금융회사가 밀집한 마틴플레이스광장 인근에서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호주 시드니 마켓스트리트의 마이어백화점에서 만난 조 설리반 씨(67). 그는 “건설회사에서 퇴직한 2년 전부터 퇴직연금과 노령연금으로 매월 5500호주달러(약 508만원)를 받고 있다”며 “젊을 때부터 가입한 퇴직연금이 연평균 10% 넘는 수익률을 올린 덕에 비교적 안정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퇴직연금 리포트] 호주, 기금 300개 '무한경쟁'…30년간 年수익률 10%
호주가 ‘은퇴자 천국’으로 불리는 데는 이처럼 퇴직연금(super annuation)이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는 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호주 퇴직연금의 지난 3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9.7%에 달한다. “높은 수익률의 원동력은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총 294개(6월 말 기준) 펀드 간 ‘무한경쟁’이다.”(호주 IFM인베스터스의 게리 위븐 대표)

○기금형 펀드 간 무한경쟁 유도

호주 정부는 2005년 ‘기금형 연금펀드 선택제’를 도입했다. ‘기금형 연금펀드’는 업종이나 지역 등에 따라 임의로 만들어진 연금운용 펀드로 한국에는 도입돼 있지 않다. 퇴직연금을 기금 형태로 운용해 경쟁을 촉진하는 동시에 펀드 선정을 좌지우지하는 산업노조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목적에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근로자들은 무조건 회사가 지정한 펀드에 가입해야 했다.

가입자들이 자유롭게 기금형 연금펀드를 선택해 가입하고, 쉽게 갈아탈 수 있게 되자 수익률 경쟁이 치열해졌다. 기금형 연금펀드마다 장점을 내세우고 가입자 유치에 힘을 쏟고 있다. 올 들어선 ANZ, AMP 등 은행이 운용하는 기금형 펀드와 업종별로 만들어진 기금형 펀드 간에 광고 전쟁도 벌어지고 있다. 호주건전성감독청(APRA)이 마케팅 과열과 상호 비난을 우려해 중재에 나섰을 정도다. 업종별로 만들어진 기금형 펀드는 기금 선택제 도입 전부터 각 산별노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덩치를 키운 퇴직연금 기금이다.

성과가 부진한 퇴직연금 펀드는 잇따라 도태되고 있다. 지난 1년간 31개의 기금형 연금펀드가 사라졌다. 뱅가드인베스트먼트 호주법인의 로이 보워먼 전략담당 대표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하고 있어 퇴직연금 수익률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며 “앞으로 기금형 연금펀드를 교체하려는 사람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대체투자 비중 확대”

기금형 연금펀드 간 경쟁은 투자 전략의 차별화를 불러왔다. 대형 펀드들이 해외주식과 대체투자로 투자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다. 운용자산 78억호주달러(약 7조3000억원), 가입자 200만명을 확보한 ‘오스트레일리안 슈퍼 펀드’의 대표 상품(밸런스드 옵션) 자산을 뜯어보면 해외 주식 비중이 31%, 대체투자가 18%다.

인더스트리 슈퍼 펀드의 사차 비들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수십억호주달러 규모로 덩치가 커진 기금형 펀드들이 국내 주식에만 투자하다간 자칫 팔고 싶을 때 처분하지 못해 수익률이 추락할 위험이 있다”며 “해외주식과 대체투자 비중을 높여온 건 고수익을 유지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중소형 펀드는 국내 투자상품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친숙해하는 자산을 많이 편입해 가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려는 전략이다. 금융그룹 챌린저의 데이비드 콕스 연금담당 대표는 “중소형 펀드는 재무설계 등 소비자 친화적인 서비스를 무기로 대형 펀드에 맞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 퇴직연금 시장에선 경쟁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업과 근로자들은 평소 거래관계를 고려해 금융회사를 선택하고, 자산운용 상품 역시 대부분 원리금보장형 위주다. 정부가 2016년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해 경쟁을 유도하기로 했지만, 일부 금융사와 노조 반발에 부딪혀 시행이 불투명하다.

시드니·멜버른=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