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CEO 짐 칼훈 주니어 컨버스 대표"컨버스 창작 엔진 되살리자" 만화·팝아트 등 다양한 협업…색다른 운동화로 부활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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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ment & Issue Focus
농구로 리더십 배운 만능스포츠맨
농구 코치 아버지와 코트 누비며
조력자로서의 리더의 역할 체득
현업 거치고 MBA로
윌슨·나이키·디즈니서 경영 실무
지적 갈증 채우려 30대 후반 MBA
위기의'올스타'를 일으켜세우다
3년 반동안 컨버스 변화 주도
작년 매출 15% ↑…하루 20만 켤레 판매
농구로 리더십 배운 만능스포츠맨
농구 코치 아버지와 코트 누비며
조력자로서의 리더의 역할 체득
현업 거치고 MBA로
윌슨·나이키·디즈니서 경영 실무
지적 갈증 채우려 30대 후반 MBA
위기의'올스타'를 일으켜세우다
3년 반동안 컨버스 변화 주도
작년 매출 15% ↑…하루 20만 켤레 판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운동화, 제임스 딘과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랑한 신발, 농구 코트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브랜드…. 모두 미국 스포츠웨어 브랜드 ‘컨버스(Converse)’의 수식어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된 컨버스는 100년간 누적판매량 10억켤레의 기록을 갖고 있다. 1923년 농구 선수 척 테일러의 이름을 딴 ‘척 테일러 올스타 컨버스’는 세기의 히트 상품이 됐다. 50년대 이후에는 당대의 스타들이 신으면서 ‘운동할 때 신는 신발’ 대신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를 굳혔다. 컨버스는 로큰롤, 펑크, 힙합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의 흐름과 함께했다. 미국 농구 스타 매직 존슨, 캐나다 배드민턴 챔피언 잭 퍼셀 등 스포츠 스타들과도 함께 땀흘린 신발이다.
2003년 나이키에 인수된 컨버스는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컨버스를 따라하는 ‘미투 제품’이 늘어나는 등 경쟁자도 급증했다. 하지만 컨버스는 지난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난해 매출은 17억달러를 기록, 전년 동기 대비 15% 증가했다. 하루에 20만켤레씩 팔려나간 셈이다.
컨버스가 100년의 영광을 되찾은 데는 짐 칼훈 주니어 최고경영자(CEO·47)의 공이 크다. 2011년 컨버스 수장을 맡은 그는 “컨버스 최초의 창작 엔진을 되살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3년 반 만에 그 약속을 지켜냈다.
롤모델은 40년 이상 명농구코치였던 아버지
칼훈 CEO의 사무실에는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미국 대학농구계 전설의 명장이자 40년 넘게 농구 코치로 활약한 아버지 짐 칼훈(71)의 사진이다. 흑백사진 속 아버지는 농구 코트에서 멋지게 슛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발에는 컨버스의 베스트셀러인 ‘척 테일러-올스타’가 신겨져 있다. 그는 “3년 반 전 나이키 본사로부터 컨버스 CEO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스쳐갔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와 함께 농구 코트에서 뒹굴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이 컨버스의 별모양 로고 ‘올스타’이기 때문이었다.
칼훈 CEO는 “리더십은 농구와 닮았다”고 말한다. 농구 코치는 골을 직접 넣을 수도, 방어를 할 수도 없고, 단지 자신의 결정을 믿는 사람들이 잘 움직여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CEO로서의 역할도 결코 나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팀과 회사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력자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매일, 그리고 일요일엔 두 켤레씩 컨버스를 신는다. 신발장 가득한 컨버스 운동화를 보며 매일 생각한다. “컨버스를 신고 내가 어떻게 보일까 고민하는 건 바보다. 컨버스는 그냥 나 자신이다”라고.
“스포츠 안에 모든 게 있다”
칼훈 CEO는 뉴욕 보스턴 외곽에서 두 명의 형제와 함께 자랐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재능이 많았고, 항상 팀 운동에 속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항상 농구, 축구, 하키 등의 선수였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익힐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할 수 있는 데다 팀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팀 운동을 하면 때로 숨은 조력자가 됐다가, 때로 팀을 이끌다가 또는 스타가 돼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운동을 제법 잘 했지만 선수로 살고 싶진 않았다. 코네티컷대 심리학과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시카고의 홍보대행사에서 일했다. 그는 “PR은 유행에 매우 민감한 일이어서 경영의 감을 익히는 데 매우 좋았지만 깊은 영감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그가 경영대학원(MBA) 진학을 목표로 퇴사를 결심한 찰나, 세계적 스포츠용품 업체인 윌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칼훈은 그곳에서 5년간 스포츠 업계의 생태계를 파악했다.
윌슨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칼훈 CEO를 나이키가 먼저 알아봤다. 나이키 본사 내 농구 관련 의류 및 용품 담당 수석 매니저를 맡게 됐다. 그는 “학업과 이직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언제 나이키가 나를 또 불러줄까” 하는 생각으로 나이키에 몸담게 됐다고 말했다. 나이키에 이어 디즈니에서 경영직을 맡던 그는 30대 후반 다시 캘리포니아대 마셜스쿨에서 MBA를 땄다.
그는 “막연한 학업 의지가 아닌 현업에서 느낀 구멍을 메우기 위해 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고,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이후 캘리포니아의 서핑과 스케이트보드 전문 브랜드 허레이, 리바이스 등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서 2011년 나이키 본사로부터 두 번째 호출을 받았다.
106년 역사 컨버스, 창작엔진 다시 부활
그가 컨버스에 둥지를 틀었을 때 회사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스포츠웨어 업계에 글로벌 브랜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더 이상 컨버스는 개성 있는 브랜드가 아니었다. 칼훈 CEO는 눈을 과거로 돌렸다. 컨버스를 100년 기업으로 키운 핵심 엔진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집중했다.
칼훈 CEO는 힙합 가수부터 헤비메탈 록밴드, 팝아티스트 등 예술가들과의 협업인 ‘컬래버레이션’에 과감히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우리는 스포츠 브랜드로 시작했지만 결국 문화의 아이콘이 됐고, 문화예술계 다양한 장르에서 컨버스만큼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패션브랜드는 또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렇게 탄생한 ‘한정판’ 컨버스 운동화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미국 애니매이션 캐릭터인 심슨, 전위적인 디자이너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컬렉션, 영국 록밴드 블랙사바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등 컬래버레이션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는 “100년 전의 기본 디자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만들어내는 이런 작업은 기존 컨버스 마니아와 신규 고객을 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된 컨버스는 100년간 누적판매량 10억켤레의 기록을 갖고 있다. 1923년 농구 선수 척 테일러의 이름을 딴 ‘척 테일러 올스타 컨버스’는 세기의 히트 상품이 됐다. 50년대 이후에는 당대의 스타들이 신으면서 ‘운동할 때 신는 신발’ 대신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를 굳혔다. 컨버스는 로큰롤, 펑크, 힙합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의 흐름과 함께했다. 미국 농구 스타 매직 존슨, 캐나다 배드민턴 챔피언 잭 퍼셀 등 스포츠 스타들과도 함께 땀흘린 신발이다.
2003년 나이키에 인수된 컨버스는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컨버스를 따라하는 ‘미투 제품’이 늘어나는 등 경쟁자도 급증했다. 하지만 컨버스는 지난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난해 매출은 17억달러를 기록, 전년 동기 대비 15% 증가했다. 하루에 20만켤레씩 팔려나간 셈이다.
컨버스가 100년의 영광을 되찾은 데는 짐 칼훈 주니어 최고경영자(CEO·47)의 공이 크다. 2011년 컨버스 수장을 맡은 그는 “컨버스 최초의 창작 엔진을 되살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3년 반 만에 그 약속을 지켜냈다.
롤모델은 40년 이상 명농구코치였던 아버지
칼훈 CEO의 사무실에는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미국 대학농구계 전설의 명장이자 40년 넘게 농구 코치로 활약한 아버지 짐 칼훈(71)의 사진이다. 흑백사진 속 아버지는 농구 코트에서 멋지게 슛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발에는 컨버스의 베스트셀러인 ‘척 테일러-올스타’가 신겨져 있다. 그는 “3년 반 전 나이키 본사로부터 컨버스 CEO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스쳐갔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와 함께 농구 코트에서 뒹굴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이 컨버스의 별모양 로고 ‘올스타’이기 때문이었다.
칼훈 CEO는 “리더십은 농구와 닮았다”고 말한다. 농구 코치는 골을 직접 넣을 수도, 방어를 할 수도 없고, 단지 자신의 결정을 믿는 사람들이 잘 움직여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CEO로서의 역할도 결코 나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팀과 회사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력자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매일, 그리고 일요일엔 두 켤레씩 컨버스를 신는다. 신발장 가득한 컨버스 운동화를 보며 매일 생각한다. “컨버스를 신고 내가 어떻게 보일까 고민하는 건 바보다. 컨버스는 그냥 나 자신이다”라고.
“스포츠 안에 모든 게 있다”
칼훈 CEO는 뉴욕 보스턴 외곽에서 두 명의 형제와 함께 자랐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재능이 많았고, 항상 팀 운동에 속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항상 농구, 축구, 하키 등의 선수였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익힐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할 수 있는 데다 팀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팀 운동을 하면 때로 숨은 조력자가 됐다가, 때로 팀을 이끌다가 또는 스타가 돼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운동을 제법 잘 했지만 선수로 살고 싶진 않았다. 코네티컷대 심리학과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시카고의 홍보대행사에서 일했다. 그는 “PR은 유행에 매우 민감한 일이어서 경영의 감을 익히는 데 매우 좋았지만 깊은 영감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그가 경영대학원(MBA) 진학을 목표로 퇴사를 결심한 찰나, 세계적 스포츠용품 업체인 윌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칼훈은 그곳에서 5년간 스포츠 업계의 생태계를 파악했다.
윌슨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칼훈 CEO를 나이키가 먼저 알아봤다. 나이키 본사 내 농구 관련 의류 및 용품 담당 수석 매니저를 맡게 됐다. 그는 “학업과 이직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언제 나이키가 나를 또 불러줄까” 하는 생각으로 나이키에 몸담게 됐다고 말했다. 나이키에 이어 디즈니에서 경영직을 맡던 그는 30대 후반 다시 캘리포니아대 마셜스쿨에서 MBA를 땄다.
그는 “막연한 학업 의지가 아닌 현업에서 느낀 구멍을 메우기 위해 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고,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이후 캘리포니아의 서핑과 스케이트보드 전문 브랜드 허레이, 리바이스 등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서 2011년 나이키 본사로부터 두 번째 호출을 받았다.
106년 역사 컨버스, 창작엔진 다시 부활
그가 컨버스에 둥지를 틀었을 때 회사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스포츠웨어 업계에 글로벌 브랜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더 이상 컨버스는 개성 있는 브랜드가 아니었다. 칼훈 CEO는 눈을 과거로 돌렸다. 컨버스를 100년 기업으로 키운 핵심 엔진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집중했다.
칼훈 CEO는 힙합 가수부터 헤비메탈 록밴드, 팝아티스트 등 예술가들과의 협업인 ‘컬래버레이션’에 과감히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우리는 스포츠 브랜드로 시작했지만 결국 문화의 아이콘이 됐고, 문화예술계 다양한 장르에서 컨버스만큼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패션브랜드는 또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렇게 탄생한 ‘한정판’ 컨버스 운동화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미국 애니매이션 캐릭터인 심슨, 전위적인 디자이너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컬렉션, 영국 록밴드 블랙사바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등 컬래버레이션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는 “100년 전의 기본 디자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만들어내는 이런 작업은 기존 컨버스 마니아와 신규 고객을 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