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메밀꽃과 이효석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이 단편 ‘메밀꽃 필 무렵’에서 봉평~대화 70리 밤길을 묘사한 이 문장은 소설이라기보다 시에 가깝다. 한국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밤길로 꼽히는 이 구절에 힘입어 해마다 9월이면 전국에서 메밀밭을 찾는 인파가 몰리고 문학축제도 펼쳐진다.

늙은 장돌뱅이 허생원이 20여년 전 정을 나누고 헤어진 처녀를 잊지 못해 이곳을 찾고, 마침내 밤길에 동행한 젊은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애틋한 사연의 현장. 봉평장터에서 이효석문학관 쪽으로 가다보면 허생원이 처녀와 사랑을 나누던 물레방앗간이 나온다. 개울물에 빠진 허생원을 동이가 업고 건너며 혈육의 정을 느끼던 흥정천도 그 옆에 흐른다.

장터 부근에서는 한 끼 식사로도 거뜬한 메밀국수부터 무 배추 고기를 넣은 메밀전병, 메밀부침, 메밀묵까지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최근에는 강원도와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의 협력 덕분에 시장 매출이 석 달 새 30% 이상 늘고 새 점포도 38개나 생겼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생전의 이효석이 봤다면 어땠을까. 그의 생애 역시 소설처럼 드라마틱했다. 열여덟 살 때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가 뽑혔으나, 본격적으로 소설을 쓴 것은 스물네 살 때부터였다. 경성제대(서울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해서는 가난에 허덕였고 총독부에 자리를 얻었다가 그만뒀다. 처가가 있는 함경도에서 교사로 일하며 점차 안정을 찾은 뒤부터 작품에 매진했는데, 평양 숭실전문 교수로 옮긴 30대 초반까지 ‘메밀꽃 필 무렵’ 등 대표작들을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1940년 아내와 둘째아들을 잃고 좌절해 만주땅을 헤매던 그는 건강을 해쳐 돌아왔고, 1942년 뇌척수막염으로 쓰러져 36세에 요절했다. 사후에도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밀려 다녀야 했다. 진부면 모친 묘소에 합장됐던 그의 유해는 영동고속도로 건설 때 용평면으로 이장됐다가 확장공사 때 아버지 고향인 함경도 실향민들의 동화경모공원(파주)으로 옮겨졌다. 그때 발을 동동 구르던 봉평 주민들의 숙원과 유족의 뜻에 따라 봉평에 다시 안장키로 하는 결정이 엊그제 내려졌다니 늦게나마 마음이 놓인다.

평창군도 문학관에 묘비를 세우는 등 평창올림픽의 문화 아이콘으로 삼겠다고 한다. 생전의 36년보다 두 배나 긴 72년을 떠돌다 고향에 영면하는 그의 무덤 위로 흐붓한 달빛과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이 흐드러진 모습을 곧 볼 수 있겠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