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금융사 '장수 CEO'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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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현 증권부장 forest@hankyung.com
외국계 증권사의 한국 법인장을 20년째 맡고 있는 A씨. 그는 어느 날 사석에서 “아시아 법인장 회의에 처음 갔을 때 홍콩과 일본 뒤에 세 번째에 있던 내 자리가 지금은 중국 인도 등에 밀려 10번째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한국의 금융산업이 그만큼 후퇴했다는 뜻 아니겠느냐”며 짓던 씁쓸한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금융시장 성숙도가 144개국 중 122위라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최근 발표를 보면 A씨의 말을 애써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이 ‘금융 후진국’으로 방치된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금융산업을 키우기 위해 뭘했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특별한 노력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것은 한국의 금융은 아마도 ‘금융회사’가 아니라 ‘금융기관’이라는 틀에 묶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KB 수난사는 ‘금융기관’ 민낯
금융가에서 최근 최고경영자(CEO)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대미문의 사건들은 ‘금융기관의 적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CEO를 평가하는 기준은 실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은행이나, 공적자금이 들어간 증권사 등의 CEO는 다르다. 임명될 때부터 실적과 능력 외에 이런저런 줄이 개입하는 것을 그동안 수없이 봐 왔다. 여기에 정치적 계산이 가세하면 더 복잡한 함수가 만들어진다. 지난달 김기범 KDB대우증권 사장이 최대주주인 산업은행과 갈등을 빚다가 물러나자 곧바로 후임 사장은 P씨라는 소문이 쫙 돌았던 적이 있다. 그 소문에는 증권회사 CEO로서 어느 정도의 실력과 경륜을 갖췄다는 인물평이 따라붙지 않았다. P씨의 부친과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의 이런저런 친분이 있다는 말만 무성했다.
업무를 수행하는 데도 온갖 간섭에 시달린다. 모 금융지주 회장을 지낸 한 인사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게 은행 제도를 고치려고 했더니 자기가 주인인 양 건방지게 군다는 소리가 금방 과천(관청) 쪽에서 들려왔다”고 말했다. “내 회사라고 생각하고 죽어라 일했더니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어진 대로 그냥 놔두지 않고, 자꾸 일을 벌이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산 게 분명하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처럼 수차례 CEO를 연임한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김정태 초대 행장부터 이번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임영록 회장, 이건호 행장까지 CEO는 모조리 징계를 받고 물러난 ‘KB 수난사’가 한국 금융산업의 민낯에 더 가깝다.
제조업과 금융, 혼돈 안돼
이런 상황이라면 금융회사 CEO가 전문가일 필요도 없다. 좋은 실적을 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아도 된다. 임기만 잘 보내고 바통을 넘기는 게 최선의 길이 된다. 금융 후진국은 정해진 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답은 하나다.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회사로 돌려놓으면 된다. 그 첫 단계는 CEO가 실적으로 평가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암묵적인 연임 제한을 없애는 게 맞다. ‘한 번 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게 맞지 않느냐’는 압력에서 해방돼야 한다. 그래야 분기·연간실적을 따지는 제조업과 달리 장기 트렌드를 잘 분석해야 하는 금융업의 특성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CEO, ‘유럽 최고의 은행가’라는 별칭을 가진 보두앵 프로 BNP파리바 CEO 등은 모두 1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봐야 할 것 같다.
조주현 증권부장 forest@hankyung.com
금융시장 성숙도가 144개국 중 122위라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최근 발표를 보면 A씨의 말을 애써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이 ‘금융 후진국’으로 방치된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금융산업을 키우기 위해 뭘했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특별한 노력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것은 한국의 금융은 아마도 ‘금융회사’가 아니라 ‘금융기관’이라는 틀에 묶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KB 수난사는 ‘금융기관’ 민낯
금융가에서 최근 최고경영자(CEO)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대미문의 사건들은 ‘금융기관의 적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CEO를 평가하는 기준은 실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은행이나, 공적자금이 들어간 증권사 등의 CEO는 다르다. 임명될 때부터 실적과 능력 외에 이런저런 줄이 개입하는 것을 그동안 수없이 봐 왔다. 여기에 정치적 계산이 가세하면 더 복잡한 함수가 만들어진다. 지난달 김기범 KDB대우증권 사장이 최대주주인 산업은행과 갈등을 빚다가 물러나자 곧바로 후임 사장은 P씨라는 소문이 쫙 돌았던 적이 있다. 그 소문에는 증권회사 CEO로서 어느 정도의 실력과 경륜을 갖췄다는 인물평이 따라붙지 않았다. P씨의 부친과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의 이런저런 친분이 있다는 말만 무성했다.
업무를 수행하는 데도 온갖 간섭에 시달린다. 모 금융지주 회장을 지낸 한 인사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게 은행 제도를 고치려고 했더니 자기가 주인인 양 건방지게 군다는 소리가 금방 과천(관청) 쪽에서 들려왔다”고 말했다. “내 회사라고 생각하고 죽어라 일했더니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어진 대로 그냥 놔두지 않고, 자꾸 일을 벌이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산 게 분명하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처럼 수차례 CEO를 연임한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김정태 초대 행장부터 이번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임영록 회장, 이건호 행장까지 CEO는 모조리 징계를 받고 물러난 ‘KB 수난사’가 한국 금융산업의 민낯에 더 가깝다.
제조업과 금융, 혼돈 안돼
이런 상황이라면 금융회사 CEO가 전문가일 필요도 없다. 좋은 실적을 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아도 된다. 임기만 잘 보내고 바통을 넘기는 게 최선의 길이 된다. 금융 후진국은 정해진 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답은 하나다.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회사로 돌려놓으면 된다. 그 첫 단계는 CEO가 실적으로 평가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암묵적인 연임 제한을 없애는 게 맞다. ‘한 번 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게 맞지 않느냐’는 압력에서 해방돼야 한다. 그래야 분기·연간실적을 따지는 제조업과 달리 장기 트렌드를 잘 분석해야 하는 금융업의 특성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CEO, ‘유럽 최고의 은행가’라는 별칭을 가진 보두앵 프로 BNP파리바 CEO 등은 모두 1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봐야 할 것 같다.
조주현 증권부장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