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모스크바물리기술원
지난달 말 러시아에 다녀왔다. 20여 년 전 방문했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차갑고 무거운 인상을 남겼던 모스크바는 활기찬 분위기의 도시가 돼 있었다. 단순히 모스크바에 국한된 변화는 아닐 것이다. 러시아가 바뀌고 있으며 그 변혁의 흐름 속에 대학도 발맞추고 있었다.

모스크바물리기술원(MIPT)은 옛 소련 시절 세워진 공과대학이다. 교수와 졸업생을 포함해 노벨상 수상자를 10명이나 배출했다. 이론 및 응용물리학, 응용수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한다. 오랜 세월 독자적인 교육 체계를 고수해 좋은 말로는 보수적, 나쁜 말로는 폐쇄적인 학풍을 갖고 있다. 하지만 탁월하다. 러시아가 발휘하는 기초과학의 저력이 이 학교에서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도도하고 자부심이 넘친다.

그런 그들이 생명과학 분야를 개척하며 변화의 포문을 열었다. 물리학과 수학만으로는 21세기 경쟁구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과감한 행정 개혁과 막강한 자금을 동원했다. 관련 분야 권위자들을 교수로 영입하고 첨단시설을 들여왔다. 그 결과 러시아 통신사 인테르팍스의 자국 내 대학 평가에서 생명과학 분야 순위를 5위까지 끌어올렸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몇 년 만에 내놓은 성과다. 그야말로 불도저 같은 기세다.

이뿐만이 아니다. 100% 러시아어 강의를 고집하던 사람들이 눈을 돌렸다. 정부에서 일하던 탁월한 행정가를 국제교류 부총장으로 발탁해 외연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국제 협력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국제자문위원회를 설립해 세계 유명 대학 장, 노벨상 수상자들을 불러 모았다. 매년 회의를 개최하고 자교의 국제적 발전 방향에 조언을 구하며 전진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겸손을 깨달아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꼿꼿하고 도도하다. 그렇다면 경쟁관계인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유럽의 다른 대학들, 그리고 우리 KAIST도 기꺼이 달려가 그들의 개혁 방향을 되짚어주고 조언하는 이유는 뭘까. 설마 하나같이 마음 좋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라서 그럴까? 국제 경쟁과 협력을 통한 상호 간 성장 발전,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갈 새로운 생존 전략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성모 < KAIST 총장 president@kaist.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