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성문(聲紋)
1965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때 CBS방송 기자가 한 청년과 인터뷰했다. 그는 카메라를 등진 채 자신이 건물에 불을 질렀다고 자랑했다. 이후 경찰은 에드워드 리 킹을 방화범으로 체포했다. 단서는 목소리였다. 재판 결과 그의 목소리와 인터뷰 음성이 일치한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이때 분석을 맡은 인물이 로렌스 커스타였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의뢰로 벨연구소에서 음성 연구에 매진하던 그는 1962년 목소리 무늬인 성문(聲紋·voiceprint)이 지문(指紋·fingerprint)처럼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기초로 화자(話者) 식별법을 개발했다. 알고 보니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적의 무전병 목소리를 분석하려고 시작했다가 종전으로 그만둔 프로젝트의 숨겨진 성과였다.

목소리는 목뿐만이 아니라 입술과 구강, 성대, 폐 등의 합작품이다. 그래서 동일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다. 이를 무늬 모양의 그래프로 그린 게 성문이다.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의 육성 테이프가 방영됐을 때도 성문 분석으로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출간된 흐루쇼프 회고록의 녹음 테이프 진위 논란 또한 유엔총회 연설음과 비교 결과 진본으로 판정됐다. 국내에서는 1987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이를 도입해 이듬해부터 Y양 유괴사건 등을 해결했다.

성문 분석과 활용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성문 분석 결과가 틀릴 확률은 10만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최근 이슬람국가(IS) 복면 군인의 미국 기자 참수 동영상이 공개된 지 이틀 만에 미·영 정보당국이 “범인은 런던 동부 또는 남부 출신”이라고 밝혀낸 것도 이 덕분이다. 동영상 속의 사막이 어느 지역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얼굴 없는 범인의 정체를 족집게처럼 집어낸 것이다.

앞으로 보이스피싱 같은 음성범죄 수사는 식은 죽 먹기일지도 모른다. 대검찰청은 납치·유괴 등 목소리가 유일한 단서일 때를 대비해 ‘음성 식별을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내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동영상 속의 목소리도 거기에 해당될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범인 리스트에 오르는 걸까. 그런 걱정도 잠시.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한 새 보안 인증 솔루션으로 목소리 인식 시스템이 각광받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래저래 목소리를 숨길 수는 없게 됐다. 차라리 호감을 주는 음색으로 관리하는 게 낫겠다. 소리에도 맵시가 있다. 부드러운 음성은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느니, 목소리가 곧 인품인 까닭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