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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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기특했던 상투적 단어들
'일상'과 '참신함' 사이 균형 찾아야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
'일상'과 '참신함' 사이 균형 찾아야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
클리셰(cliche)란 진부한 표현을 의미한다. 어원은 인쇄술에 쓰이는 연판인데 워낙 자주 등장해 아예 미리 짜놓은 단어 연판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상상해보자면 로맨스 소설에 등장하는 ‘별같이 아름다운 당신의 눈동자’나 ‘앵두 같은 입술’과 같은 묘사가 그러할 테다. 너무 자주 쓰다 보니 새로운 느낌을 환기하지 못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고만고만한 언어가 되고 만 말들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클리셰는 처음부터 진부한 단어들은 아니었다. 근원을 따져 보면 오히려 처음 들었을 때 신기하고 놀라운 표현이었던 경우가 많다. 워낙 귀에 ‘쏙’ 들어오는 새로운 표현이다 보니 인용되고 널리 퍼지다가 상투어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자신의 연인에게 ‘앵두 같은 입술’이라고 처음 말했을 때 그때만큼은 기특한 단어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운명이 대개 비슷하다.
아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축약어나 신조어도 그렇다. ‘여친(여자친구)’ ‘베프(베스트 프렌드)’와 같은 축약어는 어떤 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차별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칠 때, 가령 버스카드를 ‘뻐카’로 부르거나 고유명사 ‘맥도날드’를 ‘맥날’로 부르는 걸 보면 축약의 의도가 경제성에 있는지 구분이 안 된다. 특별한 재미도, 의미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줄여 쓰고 새로 만드는 그 노력들은 때로 클리셰보다 더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떨 땐 아주 오래된 상투어에서 투박한 진심이 전달되기도 한다. 미사여구로 꾸미지 않았을 때 맨 얼굴의 처녀처럼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감정의 보편성이라는 점에서는 말이다. 일상은 대부분 상투어로 이뤄진다. 일상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그렇고 그런 상투적 관습의 연속이다. 상투성을 깨고 새롭게 바라보는 일, 어쩌면 그것은 일상을 흔드는 일일 수도 있다.
상투어는 일상의 견고함을 유지하는 데 안정적인 면역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상투어와 참신한 단어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상투어는 삶의 모난 부분을 문지르고 떼어낸다. 그러나 상투어에 지나치게 길들 때 예민한 감성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일상의 밑바닥을 흐르는 더 큰 삶에 대한 감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곧 삶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란 예민한 관찰에서 탄생한다. 상투어를 사용하되 지배받지 않는 것, 진부한 일상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hanmail.net >
그런데 생각해 보면 클리셰는 처음부터 진부한 단어들은 아니었다. 근원을 따져 보면 오히려 처음 들었을 때 신기하고 놀라운 표현이었던 경우가 많다. 워낙 귀에 ‘쏙’ 들어오는 새로운 표현이다 보니 인용되고 널리 퍼지다가 상투어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자신의 연인에게 ‘앵두 같은 입술’이라고 처음 말했을 때 그때만큼은 기특한 단어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을 구성하는 표현들의 운명이 대개 비슷하다.
아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축약어나 신조어도 그렇다. ‘여친(여자친구)’ ‘베프(베스트 프렌드)’와 같은 축약어는 어떤 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차별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칠 때, 가령 버스카드를 ‘뻐카’로 부르거나 고유명사 ‘맥도날드’를 ‘맥날’로 부르는 걸 보면 축약의 의도가 경제성에 있는지 구분이 안 된다. 특별한 재미도, 의미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줄여 쓰고 새로 만드는 그 노력들은 때로 클리셰보다 더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떨 땐 아주 오래된 상투어에서 투박한 진심이 전달되기도 한다. 미사여구로 꾸미지 않았을 때 맨 얼굴의 처녀처럼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감정의 보편성이라는 점에서는 말이다. 일상은 대부분 상투어로 이뤄진다. 일상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그렇고 그런 상투적 관습의 연속이다. 상투성을 깨고 새롭게 바라보는 일, 어쩌면 그것은 일상을 흔드는 일일 수도 있다.
상투어는 일상의 견고함을 유지하는 데 안정적인 면역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상투어와 참신한 단어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상투어는 삶의 모난 부분을 문지르고 떼어낸다. 그러나 상투어에 지나치게 길들 때 예민한 감성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일상의 밑바닥을 흐르는 더 큰 삶에 대한 감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곧 삶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란 예민한 관찰에서 탄생한다. 상투어를 사용하되 지배받지 않는 것, 진부한 일상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