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성장 엔진’ 독일이 삐걱대고 있다.

독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수출과 산업생산은 지난 8월 약 5년래 최악으로 떨어졌고,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15개월래 최저다. 실물 경제에 빨간불이 들어오면서 독일 내 유력 경제기관 다섯 곳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0.0%, 0.1%로 하향 조정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독일발 세계 경제침체 위험까지 경고하고 나서면서 지난주 글로벌 금융시장은 후폭풍에 시달렸다.
독일 '녹슨 전차' 되나…FT, 제조업 곤두박질 4大 요인 분석
전문가들은 독일 경기 둔화의 원인을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러시아 수출 감소, 중국 성장 둔화 등 외부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독일 기업인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독일 경제가 2000년대 중반 이후 ‘제조업 강국’으로 군림하면서 자만심에 사로잡혀 정작 내부 문제를 외면해 왔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 정부가 낮은 실업률과 성장률 등 숫자에 집착하면서 정작 친(親)기업 정책, 성장 주도 전략 등은 내놓지 않았다”며 “독일식 경제모델을 수정해야 할 때”라고 평가했다. 독일을 ‘녹슨 전차’로 만들고 있는 4대 문제점을 정리했다.

○긴축의 그늘…교통 등 인프라 엉망

독일 산업계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재정위기 이후 정부가 ‘긴축’을 고집하면서 교통 등 인프라 투자가 급감했고, 이로 인해 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독일 정부는 1990년대 초까지 한 해 140억유로에 달하는 예산을 교통 인프라 구축에 썼으나 현재는 연 70억유로대로 줄였다. 정부의 인프라 투자 규모를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고정자본형성 투자비율은 지난해 1.5%대로 이탈리아(1.8%), 영국(2%), 프랑스와 일본(3.2%), 미국(3.5%), 폴란드(3.9%)에 크게 뒤진다. IMF는 올 들어 독일 정부에 앞으로 4년간 500억유로(약 69조4000억원)를 도로, 다리 등 교통 인프라 건설에 투자하라고 권고했다. 이는 독일 GDP 대비 인프라 투자비율을 0.5%포인트 높이는 것으로 앙겔라 메르켈 정부가 당초 계획한 50억유로의 열 배에 달하는 수치다.

○그린에너지 딜레마

독일은 유럽에서 에너지 비용이 가장 비싸다. 메가와트(㎿h)당 48유로 수준으로 2020년에는 61유로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미국에 비하면 두 배가 넘는다. 전기요금도 경쟁력이 약하다. 독일 산업용 전기요금은 킬로와트(㎾h)당 90유로인 현 수준에서 2020년 최고 110유로까지 오를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절반인 54유로 정도다. 지그마르 가브리엘 독일 에너지부 장관은 “재생가능 에너지 추진으로 비싸진 전기요금 때문에 독일인은 연 240억유로를 추가 지출하고 있다”며 “산업공동화 현상까지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독일 정부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자력발전 전면 폐쇄를 선언했다. 발전소의 절반가량은 운행이 즉시 중단됐고, 나머지는 2022년까지 문을 닫는다. 2000년부터 재생가능 에너지정책을 강력 추진해온 독일 정부는 2025년까지 독일 전체 전력 중 40%를 풍력, 태양광, 파력으로 생산하겠다고 선언했다. 재생가능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은 높은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또 전체 전력 소비의 25%를 차지하던 원자력을 포기하면서 석탄 사용이 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급증세다. 메르켈 정부가 ‘에너지 딜레마’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뒤처진 혁신과 저출산의 늪

최근 독일 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것은 정보기술(IT) 분야다. 세계 경제가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IT·서비스업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는데도 독일은 디지털 혁신에서 뒤처졌다. 자동차를 만드는 건 독일이지만 무인 운전 기술은 모두 미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이다.

정부의 IT인프라 투자도 미미하다. 무선 브로드밴드 가입률은 2013년 말 기준 체코공화국, 폴란드, 슬로바키아보다도 낮다. 브로드밴드 가입자 중 광대역 이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6.7%보다 낮은 1.7% 수준이다. 미국의 IT 투자 규모가 연간 6500억달러에 육박한 반면 독일은 1000억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디지털과 에너지부문에서의 투자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럽 내 출산율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독일은 숙련공 부족에 직면했다. 독일 내 65세 이상 인구는 현재 전체 인구의 21%로 일본과 맞먹는다. 2030년까지 노동가능인구는 지금보다 10% 이상 감소해 3900만명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자동차부품회사인 보쉬의 로베르트 한스 경영지원 이사는 “기술 전수가 필수인 독일 산업구조에서 노동인구 감소는 최대 위협”이라며 “폐쇄적인 이민정책을 전환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