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훈동 노화랑의 가을 기획전 ‘근대의 화선 4인’전에 출품될 청전 이상범의 ‘추경산수’. 노화랑 제공
서울 관훈동 노화랑의 가을 기획전 ‘근대의 화선 4인’전에 출품될 청전 이상범의 ‘추경산수’. 노화랑 제공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왼쪽 산밑에서 나와 오른편의 야트막한 기슭으로 휘돌아나가는 길이 나직하게 이어진다. 드문드문 늘어선 나무 사이엔 낙엽들이 흐드러지게 뒹군다. 야산과 개울물은 간접조명처럼 뒤뜰을 환하게 껴안는다. 새참을 이고 가는 아낙네의 걸음걸이에도 추색이 만연하다. 근대 한국화의 대가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의 ‘추경산수’(63×180㎝)는 온 천지의 가을 기운을 마음껏 펼쳐 보여주는 작품이다.

청전을 비롯해 소정 변관식(1899~1976), 월전 장우성(1912~2005), 운보 김기창(1913~2001) 등 한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로 승화시킨 한국화가 네 명의 작품 20여점을 모은 ‘근대의 화선(畵仙) 4인전’이 15~31일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열린다.

소정 변관식의 ‘낚시터’.
소정 변관식의 ‘낚시터’.
전통 수묵채색화를 근대적인 양식으로 재창조한 청전, 강렬한 준법으로 독특한 수묵화 세계를 구축한 소정, 한국 회화의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월전,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한 운보가 남긴 그윽한 묵향의 예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다.

한국 산천의 아름다움을 품격 있게 그려낸 소정의 작품 ‘포운연수(浦雲烟樹)’도 걸린다. 구름과 안개, 수풀로 뒤덮인 해변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소정이 한국적 회화를 정립하기 위해 방황하던 시절의 수작으로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갈대가 우거진 강가에서 ‘시간을 낚는 강태공’을 그린 ‘낚시터’ 또한 역작이다.

시(詩), 서(書), 화(畵)에 두루 능한 월전의 예술적 열정도 작품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원숭이가 고고를 추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린 ‘춤추는 유인원’은 간결하고 담백하되 기운이 담긴 동양화의 획을 살렸다. 선비화가답게 현실 세태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조음(潮音)’도 출품된다.

민화와 산수화를 접목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운보의 작품도 여러 점 걸린다. ‘청록산수’엔 호방함과 시원함이, ‘바보산수’엔 조선 민화의 대담한 변형과 자연스러운 생략과 익살의 멋이 가득하다. 흥겨운 춤사위를 통해 우리 겨레의 신명을 현대적인 미감으로 붓질한 ‘농악’ 역시 운보 특유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근대 한국화 거장들의 빛깔과 미의식을 통해 고단한 현대인의 삶을 위로하고 싶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02)732-35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