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에 뺏기는 'MRO 시장'
2011년 동반성장위원회가 국내 대기업의 소모성자재 구매대행(MRO) 사업 확장을 제한한 이후 해외 대기업 MRO들이 국내 시장에 속속 진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도입한 규제 정책이 해외 대기업에 ‘안방’을 내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재계에 따르면 독일 뷔르트는 올해 상반기 국내 중소기업 한국화스너를 인수해 국내 MRO 시장에 진출했다. 뷔르트는 작년 매출이 12조원에 달하는 독일 최대 MRO 기업이다. 뷔르트는 한국화스너를 거점 삼아 볼트 너트 등 국내 산업용 기자재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일본 미스미그룹도 올해 1월 한국법인(한국미스미)을 만들어 공구 기자재 등 MRO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작년엔 세계 최대 MRO 기업인 미국 그레인저의 일본 자회사 모노타로가 한국시장에 진출했다. 모노타로는 작년 4월 한국법인(나비엠알오)을 세운 지 1년6개월 만에 3만여개 국내 기업을 고객사로 확보했다.

해외 MRO기업 3년 뒤 시장장악 불 보듯
동반위, 사업제한 연장 여부 내달 확정


해외 MRO(소모성자재 구매대행) 대기업이 잇따라 국내시장에 진출하는 건 ‘규제정책’이 빚어낸 결과다.

동반성장위원회는 2011년 11월 대기업 MRO 계열사가 일정 규모 미만의 기업을 신규 고객사로 확보하는 것을 향후 3년간 엄격히 금지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 규제에 따라 대기업 MRO는 계열사나 연매출 1500억원 이상 중견기업만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 사실상 국내 영업에 제한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은 2011년 MRO계열사인 아이마켓코리아를 인터파크에 매각했다. SK그룹은 ‘행복나래’라는 MRO계열사를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했으며 비슷한 시기 한화그룹도 MRO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서브원(LG 계열), 엔투비(포스코 계열), KeP(코오롱 계열) 등 나머지 대기업 MRO 회사들은 국내 영업 제한 규제 이후 해외시장에 주력하거나 기존 사업을 대폭 축소했다.

이상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정책팀장은 “해외 대기업들이 국내 MRO 시장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까지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2~3년 뒤 시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며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취지의 동반성장 규제가 불러온 역효과”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동반성장위는 다음달 대기업과 중소기업계 의견을 수렴해 ‘MRO 사업제한 가이드라인’을 3년 더 연장할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대기업들은 ‘연매출 1500억원 이상 기업’만 신규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한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요구하는 반면 중소 MRO업계는 ‘대기업 MRO는 연매출 5000억원 이상 기업만 신규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계는 MRO뿐만 아니라 LED(발광다이오드)조명 등 규제의 역효과가 발생하는 업종에 대해선 동반성장 정책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규제 시행 이후 빚어지는 ‘국내 기업 역차별’ ‘해외 기업의 점유율 확대’ 등을 정밀 분석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LED조명 시장의 경우 동반성장위가 2011년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지정하면서 필립스 등 해외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5.5%포인트 올랐다. 중소기업적합업종은 아니지만 급식 업종에서도 비슷한 일이 나타나고 있다. 2012년 정부는 중소 급식 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공공기관 급식사업(구내식당 운영)에 대기업 참여를 제한했는데, 이 규제로 공공기관 급식은 미국 아라코 등 외국계 기업과 중견기업이 독식하고 있다.

이태명/김우섭 기자 chihiro@hankyung.com